연성/하나

[현성] 오! 아름다운 나의-

(청)새치 2016. 2. 23. 02:55

2012.02.02



big baby driver :: spring I love you best







성규가 고개를 돌렸다. 색소가 옅은 머리칼이 가닥가닥 공간으로 흩어져 간다. 그 나풀거리는 모습이 우현의 눈 속에서 점점 그림으로 점착되어 갔다. 채광이 잘 드는 실습실에 쏟아지는 햇볕을 받아 밝게 빛나는 머리칼과 흰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이 우현의 눈을 타고 손으로 그림이 돼 간다.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검고 검은 윤기가 도는 눈동자가 우현을 향했을 때, 비로소 우현의 손은 멈추었다. 멀지 않은 둘의 사이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아주 천천히 성규의 눈이 반원을 그리면서 휘어진다. 그리고 그의 미소에 우현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다 그렸어?"
"응."

오랜 시간 쓰지 않고 닫혀 있던 성대는 가라앉은 소리를 내었다.

"봐도 돼?

이번에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그런 우현을 본 성규의 말간 얼굴이 살짝 갸우뚱 하다가 간이의자에서 내려선다. 한 발 두 발 내 딛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서 금방 우현의 뒤에 서서 캔버스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바로 뒤에서 다가오는 성규의 기척에 우현은 선뜩함을 느끼며 제 그림을 바라본다. 아득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성규가 우현의 캔버스 안에 있었다. 찬란한 햇빛의 총천연색을 온 몸으로 받아 머금은 성규가. 성규가 우현의 캔버스 안에 있었다.

"예쁘다아..."
"응. 예쁘다."

우현이 웃고 성규가 따라 웃었다. 낮게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렸다.






오! 아름다운 나의-







우현이 성규를 처음 만난 것은 햇살이 만연한 나른한 어느 날의 오후였다. 모처럼의 주말을 맞아 아무 생각도 없이 햇볕을 마구 받을 셈으로 나온 나들이였다. 가벼운 몸과 가벼운 마음으로 오후 햇볕을 받는 가벼운 나들이였다. 아직 따스한 오후 햇살을 도심 속에 경치도 좋게 덩그러니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가득가득 쏘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우현의 프레임 속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하나 둘 씩 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연인인 듯 팔짱을 끼고 연신 방싯 대며 빠르게 움직이는 한 쌍의 남녀, 바쁜 일이 있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중년의 남성, 만날 약속을 정하는 듯 연신 핸드폰에 대고 빠르게 이야기 하며 또각이는 구둣발 소리를 내는 젊은 여자의 모습은 모두 찰나의 시간 동안 우현의 프레임 속에 들어오는 풍경 들이었다. 카메라의 셔터가 찰칵 찰칵 거리듯 우현의 눈이 깜빡 깜빡 할 때 마다 새로운 풍경들이 우현의 각막에 새겨 들어온다. 빠르고 또 느리게 변하는 그 프레임 속의 풍경들은 권태롭고도 단조로운 것이었다. 무엇하나 튀지 않고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회색빛 같은 일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현이 그 일상 속에 녹아들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있는 것은 일종의 일탈과도 같은 것이었다. 치열하게 살고 생각하고 짜 내어야 하는 미래에 대한 것들에서 벗어나 미지근하고 단순해지는 일탈이었다. 회색빛이 만연한 일상이 점철된 우현의 프레임 속에 빛무리가 하나 불쑥 튀어 들어온 것은 어쩌면 운명의 장난이었을 지도.

벤치에 앉은 우현이 다리를 쭈욱 하고 뻗었다.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이 이번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프레임 속에 집에 넣었다. 느릿한 발걸음, 빠른 발걸음,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타는 발걸음 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일상과 다르지 않게 여상스런 그 움직임들을 머엉- 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프레임 한 쪽 구석에서 수줍은 듯 운동화 앞 코가 불쑥 튀어 나왔다. 이제 막 브랜드택을 떼어낸 듯한 운동화의 앞코는 하얗게 빛났고, 운동화 목 위로 툭- 불거진 복사뼈가 탐스럽게 여물어 고개를 내 밀고 있었다. 그리고 급한 일을 가는 듯 불안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 우현은 그 여상스런 움직임을 여상스럽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속으로 셈을 하나씩 더할 때 마다 그 발은 가까워 져서, 우현은 그 복사뼈 위로 시선을 점점 옮기고 있었다. 시간이 가쁜 듯 연신 시간을 확인하며 우현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발 두발, 움직이는 발이 잠깐 꼬였다가 다시 돌아온다. 발걸음이 더욱 불안해 지고 있었다. 다시 두발 세발, 내 딛는 발걸음들이 거듭될수록 이번엔 우현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왓!"
"괜찮으세요?"

기어코 남자는 제 발에 걸려 중심을 잃고 만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관전하던 우현이 타이밍에 맞추어 남자를 받쳐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남자는 우현의 품속에서 가쁜 숨을 쌕쌕 내 뱉고 있었으니까. 부끄러운 듯 살짝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귀를 보고, 우현은 입을 떼기로 했다.

"저.."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우현의 말을 가로막고, 제 할 말을 내 뱉으며 남자는 금세 품에서 떨어졌다. 아쉽게 흩어지는 품속의 기척을 채 떨쳐 내기도 전에 남자는 고개를 꾸벅 하고는 다시 급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빠르게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우현은 두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그 기척의 잔 감을 느끼며, 다만 방금 전의 그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가늠할 뿐이었다.


-


우현이 성규를 다시 만난 것은 학교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전학한 학교의 새 교실에서. 우현은 성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들은 우현이 공부에서 손을 놓는 것을 두려워했다. 요는 이 학교가 우현이 공부에서 손을 놓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그림도 계속 할 수 있는 그런 곳이라는 뜻이었다. 학기 중에 갑작스런 우현의 전학이 용인된 것은 그 것 때문이었다.

"미술실 열쇠는 있다가 따로 주마."

담임인 듯한 남자의 말에 우현은 고개를 끄덕 거렸다. 인상이 나쁘지 않은 이 교사는 아마도 학생들한테 꽤나 인기가 있을 것이다. 웃는 모습이 물렁해 보이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뒤따라가며 우현은 얽히는 두개의 발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규칙적으로 또각또각 하고 복도의 허공을 울리는 소리를 우현은 조용히 곱씹었다. 그리고 2학년 3반의 숫자가 붙은 교실 속으로 따라 들어 갔을 때, 우현은 본 것이다. 지난 주말의 감각을 모두 되살리는 기억의 주인공을.

우현은 천천히 걸어서 교탁 앞에 섰다. 그리고는 창가자리의 중간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그 곳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그가 있었다.

"남. 우현 입니다."

시선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저에게 배정된 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시선을 거두지 않은 그의 눈이 깜빡깜빡 거리며 우현을 본다. 그 것은 우현이 잘 알고 있는 행동이었다. 대상을 눈 속에 각인 시키는 그 행동들은 우현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맞닿는 그 시선을 온전히 받으며 우현은 가볍게 입술의 양끝을 끌어 당겼다. 그러자, 그도 가볍게 가련한 입술 끝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찾았다.
하고
우현은 웃었다.



-



우현은 커다란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미술 실습실 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한참을 보다가 은색 열쇠를 문고리에 집어넣는다. 잘 맞게 자리를 잡는 철컥 이는 소리가 들리고, 열쇠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힘을 주어 문을 열자 낡은 냄새가 코끝으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유화물감 냄새와 석고냄새가 뒤 섞여 맴돌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실습실은 생각보다 괜찮아서 우현은 얼른 작은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빛이 잘 들어 불을 켜지 않아도 밝아서 그대로 연습장을 꺼내 페이지를 펼쳤다. 그릴 것이 있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스케치를 하고, 그리고 싶었다. 연필을 잡고 연습장위로 열심히 움직인다. 얼굴 윤곽이 점점 잡히기 시작하고 얼굴의 디테일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즈음. 우현은 테이블위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눈 코 입이 없이 윤곽만 집혀 있는 얼굴이 공허하게 우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질 않아서 그릴 수가 없었다.

작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던 눈을, 아침의 건조한 공기를 촉촉하게 머금은 입술을, 한 가운데에 균형을 잡고 있던 예쁜 코를 우현은 감히 그릴 엄두가 나질 않아서 우현은 다시 연필을 들 수가 없었다. 깊이 들이마신 숨을 후욱 하고 내 뱉자 부유하던 먼지가 출렁이며 멀어졌다. 그리고는 연습장 위로 털썩 하고 엎드리고는 멍하게 아무 것도 없는 벽을 보는 것이다. 빈 여백만 있는 공허한 벽에 자신을 보며 말갛게 웃던 모습을 눈으로만 천천히 그려 보면, 벽에서 서서히 떠올라 우현을 보며 생긋. 하고 웃는다.

생긋.
이름이..뭐더라.
성규...김...성규...

말랑하게 웃던 교사가 출석부를 보며 불렀던 이름. 김성규.

우현이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밀며 벌떡 일어섰다. 우현이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물러서다가 콰앙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문 앞에서 낮게 키득 거리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밀려 들어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우현이 아까 전 열쇠로 열고 들어왔던 입구였다.

커다란 입구 문 앞에서 낮게 키득거리며 서 있는 것은, 우현이 그리도 그리고 싶어 하던 성규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려? 나를?"

반문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 하고 기울이는 성규를 보며 우현은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의 뮤즈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 하자 성규가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운다.

"내 모델을 해줘."



-



"몸에 힘을 좀 빼"
"뺐어."
"어깨도"
"뺐어"
"뭐가 그렇게 긴장이 돼?"
"처음이잖아!"

아직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성규를 보며 우현이 가늘게 웃었다. 성규가 울상을 지으며 우현을 노려본다. 방과 후의 희미한 햇볕이 실습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성규의 얼굴에도 희미한 음영이 드리웠다.

"긴장 안 해도 돼."

우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성규의 눈썹이 팔자모양으로 축 처진다.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어떻게 평소처럼 하냐는 듯 의문을 담은 반문을 해오는 성규를 보며 우현은 난처한 듯 살짝 웃다가 다시 어깨를 으쓱 했다. 예를 들면, 우현이 말 하며 양 팔을 가슴께에서 팔짱을 끼운다.

"창문을 본다거나..."

우현이 턱짓으로 커다랗게 뚫린 창문을 가리키자 성규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간다. 창을 타고 넘어오는 빛을 모두 받겠다는 듯 창을 향한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훨씬 낫네."

혼잣말을 하듯 작게 읊조리는 우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성규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



"준비는 잘 돼 가니?"

웃는 얼굴만큼이나 물렁한 말투가 우현의 귀를 파고들었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우현은 요 근래 문제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우현에게 관심을 끊지 않았다. 누군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우현을 보았고, 누군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귀찮게 덕지덕지 붙는 그런 것들을 우현은 꽤 괜찮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마무리작업 중이에요."

우현이 말을 하자마자 물렁한 웃음이 떠올랐다. 안심이 됐다는 듯 어깨를 툭툭 털어주면서 그만 올라가 보라고 말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고개를 꾸벅이자 '그래' 하는 목소리가 낮게 들리었다.

출품작은 지금 그리고 있는 성규 그림이었다.

햇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성규 그림이 마지막 마무리를 앞두고 실습실에서 우현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한 칸 두칸 올라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까,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무어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하는 정도의 상상을 하며 교실 입구 앞에 섰을 때,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조금은 낯선 목소리를 들으며 우현은 문틈으로 살짝 보이는 교실 안을 훑어본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교실 속에서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머리통이 도란이고 있었다. 하나는 우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머리통이어서 문을 다 열지 못했다.

"이제 얼마나 남았대?"
"마무리래"
"왜 한다 그랬어?"
"내가 하고 싶어서. 왜..질투해?"

성규가 베싯 하고 웃는다. 뒤통수만 보임에도 그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마냥 훤해서 우현은 조금 울적해졌다. 우현이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교실 문손잡이를 꾹 하고 잡았다. 건너편의 낯선 머리통이 점점 성규의 머리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쪼옥- 하고 가볍게 성규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우현은 소리 없이 교실 문을 살짝 닫았다.



-



"예쁘다아..."
"응. 예쁘다."

우현이 웃고 성규가 따라 웃었다. 낮게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렸다.

"너 먼저 가 난 뒷정리 하고 갈게."
"응. 고마웠어."

성규가 가볍게 웃으며 빠르게 실습실 밖으로 나서는 것을 우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머리칼이 어롱거리다가 문 뒤로 사라졌다. 우현이 시선을 다시 잡아끌자. 이번엔 그림 속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성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머금은 성규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그림속의 성규는 우현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현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종이에 남기기로 한다.




우현이 실습실의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이 내린 미술실에 남은 것은 그림 한 점과, 흰색 봉투가 하나.



-



그림과 봉투는 성규에게 전해졌다.



-




아름다운 너의 존재는 나의 깊은 애욕을 깨웠고,
그럼에도 너를 가질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나의 슬픈 사랑은 너에게 닿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서 먼저 떠난다.
사랑하는 나의 뮤즈.
아름다운 너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계속, 아름다워라.







병희가 죽는걸 보고 썼더니
나의 허세가 그득한 글이 됐다.

* 물풀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04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