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규] 봄의 여름 (1/2) For. 달토킼
당연한 일이지만 복도에는 인기척 하나, 하다못해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끔 지나치는 교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어른의 사무적인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역시 들려오는 목소리도 없다. 교실 하나를 지날 때 마다 꼬박 꼬박 확인했던 표지판은 학년 당 두개를 넘지 못하는 대신 층수가 높아졌다. 1층을 지나서 2층 3층까지 올라가서야 1학년 반 표지를 볼 수 있었다. '한살이라도 더 어린놈들더러 더 움직이라는 뜻이지 뭐' 하는 담임의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작고 오래된 학교에서는 바른지 오래되지 않은 독한 왁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문이라도 좀 열어주면 좋을 텐데 꽉 닫힌 창문 덕에 익숙하지 않은 냄새는 자꾸만 정도를 더해갔다. '애들이야 뭐 다 고만고만하니까 적응은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무심하게 말하며 저를 돌아보는 담임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사실 걱정이 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복도 바깥쪽으로 난 창문으로는 넓게 펼쳐진 푸른 밭이 보였다. 구멍가게에 가까워 보이는 매점, 그리고 다들 고만고만하게 들어선 상가건물들 몇 채를 빼고는 정말로 밭 말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생소한 풍경들에서는 벌써부터 지루함이 느껴져 명수는 마른콧물을 킁킁하고 들이켰다.
"자 여기가 1학년 2반이야"
방금 전까지 궁시렁거릴 때보다 조금은 의욕이 들어간 담임의 말을 흘려들으며 교실 문 위를 올려다보니 과연 1-1이 선명히 박힌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위로 올렸던 눈을 다시 되돌리기 무섭게 담임은 박력 넘치는 모양새로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늠름한 모양새로 교실 안으로 들어선다. 당황할 새도 없이 쫄래쫄래 따라서 들어서니 과연 수십 쌍의 선명한 눈이 명수에게로 몰려들었다.
"반장!"
담임의 호명에 말끔한 모양새의 남자애가 앞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갈하게 각까지 잡힌 다림질 자국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갸름한 얼굴에 가늘게 뻗은 눈이 명수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무심하게 저를 훑고 지나가는 눈빛에 괜히 발끝을 교실바닥에 통통하고 쳐 댔다. '차렷. 경례.' 외모만큼 정갈한 목소리가 내는 구령에 맞춰 교실을 꽉 채운 머리통들이 일제히 앞으로 쓰러졌다가 돌아갔다. 의도치 않게 인사를 받는 입장이 되어 어색하게 서 있는 명수를 가리키며 담임은 갑작스레 말을 시작했다.
"갑작스럽지만 전학생이 왔다. 여기 온지 얼마 안돼서 많이 낯설어 할 테니까 많이 도와주고. 이름은 김명수다. 자 인사."
담임은 빠르게 제 할 말을 마치고는 명수에게로 턴을 넘겼다. 어쩐지 명수가 했어야 했을법한 말들을 모두 담임이 가로채 간 탓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저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것뿐이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뻣뻣한 모양새로 인사를 마치는 명수에게 담임은 다시 또 갑작스럽게 반장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명수는 반장 옆에 빈자리에 앉으면 되고. 반장은 앞으로 신경 좀 써줘라."
특별히 신경 써서 마련해 놓은 자리라는, 명백히 생색이 묻어나는 말을 들으며 뻣뻣하고 어색하게 반장의 옆자리를 찾아 가 앉았다. 그 모습을 반장은 조용히 바라만 보다 명수가 책상위에 교과서를 턱턱 꺼내 올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한 마디를 툭 하고 내 뱉었다.
"성규야. 김성규."
"으. 응?"
갑작스레 귀를 간지럽히는 소곤소곤한 목소리에 멍청한 대답이 나갔다. 그 반응에 반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명수의 얼굴을 빤안히 바라볼 뿐이다.
"옆자리니까. 이름 알아야지."
"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벙찐 대답을 하는 명수에게 반장. 아니 성규가 씨익 하고 먼저 웃어보였다. 사실 씨익 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옅은 미소이기는 했지만 명수에게는 다 똑같아 보였다. 그 사이에 유난히 의욕이 없어 보이는 담임의 조회는 마무리가 돼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복 착의 기간임에도 동복하의를 섞어 입은 놈들을 하나 둘 지적 해 벌점 표를 만드는 것으로 조회를 마무리 지은 담임은 인사도 생략한 채 역시 빠른 몸놀림으로 교실에서 벗어났다. 옷깃 하나 까지 모두 교실 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그렇게 조용했냐는 듯 왁자지껄 해지는 소리들은 모두 명수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디에서 전학 왔어?"
장난기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한 남자애 하나가 벌써 옆에 와 책상에 들러붙었다. 그러자 곧 봇물이 터지듯 '여기 어디로 이사 온 거야?' '여기서 학교 다니기 불편하지?' 하는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엉켜 결국 하얀 백지가 돼 버린다. 질문은 하나씩 순서대로 하는 게 좋은데 같은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두 눈만 끔뻑끔뻑 거리던 명수에게 보이는 것은 맥락 없게도 책을 들여다보는 성규의 모습이었다. 시끌시끌한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책 위로 열심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많이 뭉툭해진 연필 끄트머리에서는 수식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것이 한 학기 뒤에나 배울 내용이라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른 때였으면 '재수 없는 놈'이 되었을 성규가 이번에는 물음표 소년이 되었다. 명수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물음표뿐이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수에게 쏟아지던 그 우레와 같은 관심들은 한나절도 가지 않아 절반으로 뚝 하고 떨어졌다. 가장먼저 명수의 전학생이라는 포지션과 보기 좋은 외모를 노렸던 무리들이 금세 흥미를 잃은 것이 컸다. 이리저리 여러모로 사고치기 좋아하는 저들과 어울릴 성격이 못 된다는 걸 재빠르게 알아채고 나서는 서둘러 관심을 거두어 가 버린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마뜩찮은 동문서답과 그들의 성에 차지 않는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지만. 어쨌든 그 대가로 과하게 쏟아지던 관심과 소란이 사그라지자 교실 사정은 급속도로 평소의 모습을 찾아가는 듯 했다. 그리고 그제야 명수는 제 짝, 그러니까 성규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안."
명수의 말에 한참 책(이번엔 소설책이었다.)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 성규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명수는 마치 '뭐가?' 하고 저에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얼굴에 눈을 맞추었다.
"나 때문에 공부 방해 된 거 아냐?"
"쉬는 시간은 원래 쉬라고 있는 거잖아"
성규의 고개가 다시 책으로 똑하고 떨어진다. 명수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물음표들이 한 번에 와르르 하고 쏟아져 내려가고 느낌표 하나가 똑! 하고 떠올랐다. 대답은 과연 명쾌해서 딱히 말을 덧붙이거나 항변을 할 거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명쾌함과는 달리 명수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멋쩍은 미소였다. 어딘지 모르게 벽이 하나 둘러쳐진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저를 무시한다거나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게 좋게'가 모토인 명수에게 그 것은 조금 불편한 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여태 이렇게 까지 저에게 무뚝뚝한 상대는 만나본 적이 없는 탓도 있었다. 미남이라고 제 입으로 말하진 못해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얼굴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외모 덕에 어디 가서 홀대 당하는 일은 겪어본 일이 없었던 것도 컸다. 그 영광의 과거를 떠올리며 명수는 제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아무래도 오늘 처음 만난 짝은 친해지기가 적어도 당분간은 힘들어 보였다.
*
?
명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다시 물음표다. 그 것이 바로 요 며칠간 관찰해 온 성규에 대한 명수의 감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종잡을 수 없다거나 영문을 알 수 없다거나 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냥 물음표였다. 성규에 대한 것은.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공부를 하는가 보다 하고 있다 보면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장르 소설이나 만화책이 손에 들려 있었고, 가만히 앉아 미동도 없는 권태로운 표정을 보며 귀찮은 걸 싫어하나 보다 하고 있다 보면 어디선가 나타난 급우1 에게 수학문제 풀이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에는 많이 보기 힘든 은은한 미소까지 입에 달고 있어 명수를 벙찌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한 사건은 결국 일어나고 만다.
그러니까 그 것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언제나 있는 오후의 나른한 수업시간이면 되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교시의 수업. 과목은 또 하필이면 국어였다. 이 시대 최고의 자연산 수면제, 국어. 명수는 가장먼저 턱을 괴었다. 그리고 펜을 잡은 손으로 교과서 위를 꾸욱 하고 누르고는. 미동도 없이 있는다. 귓속에 들리는 것은 뭐라 하는지 모를 왱알왱알 거리는 국어 담당 교사의 책 읽는 소리와, 털털 털털 하고 돌아가는 천장에 달린 낡은 선풍기 네 대의 소리였다. 가끔 뒤에서 작게 수근수근 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곧 한데 섞여 결국엔 이색저색 난잡하게 섞인 물감처럼 부옇게 귓가에 윙윙 거리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점점 힘이 풀려가는 눈꺼풀이 벌어지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자면 안되는데에.. 하던 머릿속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텁.
반쯤 감겨 다시 돌아갈 줄 모르던 명수의 눈이 금방 커다랗게 벌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초록색 포장지를 입은 초록색 청포도맛 알사탕이었다. 집 나갔던 정신머리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끔뻑끔뻑하고 멍청하게 알사탕을 보다가 그 것을 넘겨주었을 성규에게로 고개를 옮겼다. 딱히 표정을 찾아볼 수 없는 성규가 다시 알사탕을 명수의 앞으로 끌어 놓아주었다.
"졸릴 때 먹으면 좋아."
역시 달리 바뀌지 않는 표정으로 제 입에서 한 바퀴 돌리던 초록색 알사탕을 가리킨다. 붉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의 초록색 알사탕은 묘하게 조화로웠다.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명수는 재빨리 사탕의 포장을 벗겨내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금세 시큼하고 단 맛이 입안에 번진다. 그러자 곧 성규의 잇새에 있던 번들거리던 초록색 알사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갑작스레 훅 하고 올라오는 열 기운에 고개를 붕붕 저어 기억을 흩트린다. 옆자리의 성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고개를 칠판에 고정시켜 두고 있었다.
"고마워."
간신히 옆자리에 들릴 정도로 소곤소곤 거리는 목소리에 성규의 고개가 단번에 명수에게로 향했다. 깜빡깜빡 하고 작은 눈이 바쁘게 움직이다가 사락 하고 그 중앙을 휘었다. 이번엔 명수의 눈에 바쁘게 깜빡깜빡 거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서곡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햇빛을 피할 곳이 없다. 저를 표적으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햇볕을 딱히 막아낼 방법도 없이 점점 타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터덜터덜 걷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정도로 더운 날이면 한번쯤 데리러 와줘도 좋을 텐데 명수의 부모님 두 분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단호하고 했으므로 그 것은 이루어질 일이 요원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자전거라는 차선책 역시 두발 자전거의 뒤를 잡아줄 시간이 없었던 부모님 덕분에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투덜거릴 힘도 없이 축 늘어져 운동화로 시멘트 바닥을 툭툭 밀어 차며 집으로 향하고 있던 차였다. 명수의 눈에 묘한 위화감이 드는 풍경이 들어온 것이다. 까맣고 자그마한, 눈에 익은 뒤통수가 종종 걸음을 치며 제 앞에서 열심히 걷고 있었다.
성규였다.
처음엔 잘못 본건가 싶어 눈을 비벼댔더니 뿌옇게 번진 시야로 여전히 종종걸음을 치는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그제야 정말로 성규인 것을 믿었다. 입 안에서 갑작스레 달큰한 맛이 돌았다. 명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 것은 명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반장!"
성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생각보다도 너무나 커다랗게 나간 목소리에 당황한 명수의 입이 꾹 하고 다물렸다. 성규의 얼굴에는 금방 의문이 떠오른다.
"왜?"
차분한 얼굴을 마주보며 명수는 침을 꼴깍 하고 넘겼다. 딱히 긴장이라고는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도.
"왜 이쪽으로 가?"
"집이 이쪽이니까"
이번엔 명수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이쪽으로 가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망가져서 수리 보냈어."
평온한 목소리가 명수의 귓가를 시원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럼 같이 가."
명수의 말에 성규는 명쾌하게 긍정의 뜻을 내고는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명수 역시 그 종종걸음을 따라 발걸음을 시작한다. 전학 후 처음으로 짝과의 하교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것이 전부였다. 뜨거운 햇볕도, 무겁게 처지는 발걸음도, 그리고 침묵도. 딱히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지 못한 둘 사이에 흐르는 것은 침묵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것에 개의치 않는 듯 성규의 발걸음은 여전히 경쾌하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고, 그 옆에서 나란히 걷는 명수의 눈은 조심스레 성규에게 곁눈질을 하였다.
가볍게 들고 다니는 듯 한 백팩은 납작하게 눌려 등딱지처럼 눌려 있었다. 집에서 신경 써 다려주는 듯 한 하복 셔츠와 바지는 각이 서 있었다. 그리고 헥-헥- 하고 밭게 내는 숨과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희미한 땀줄기. 그래도 열심히 움직이는 경쾌한 발걸음. 명수의 발이 갑작스레 우뚝 하고 멈추었다. 한두 발짝 알아채지 못하고 앞서가던 성규도 금방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명수를 돌아다본다. 여전히 밭은 숨을 내면서.
"덥다 그치?"
난데없는 명수의 말에 얼굴의 의문이 서린 고개가 갸우뚱 하고 기울었다.
"땀 좀 식히고 가자."
마침 개울가가 근처였다. 성큼성큼 한두 발 정도 다가가 여전히 의아함을 풀지 못한 성규의 손목을 잡고 개울가로 끌어내었다. 채 대답을 하지 못한 성규의 몸은 딱히 저지를 할 생각도 없는 듯 순순히 끌려왔다.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가는 길이 짜증날 때마다 하던 것을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게.
개울가에 있던 넓은 바위 위에 신발과 양말을 벗어 두고 앉아 발을 담갔다. 차가운 기운이 금방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곧 만족감 같은 포만감이 퍼졌다. 절로 미소가 올라왔다. 같이 맨발로 개울물을 파닥파닥 거리면서 시큰시큰한 청포도 사탕을 입에 물고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