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당신이 쓴 글의 가장 마지막 문장을 새로운 글의 첫 문장으로 사용하라
대상 글 : http://spearfish.tistory.com/32
이 글은 엘규.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기장을 덮은 명수가 가장 마지막에 읽은 문장은 틀림없이 그랬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거나 마음이 마냥 무겁거나 할 줄 알았는데 머릿속은 의외로 고요하고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라면 이 비밀을 알고도 자신이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 것은 가장 친한 친구의 비밀스런 감정을 알아채서도 아니었고 친구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 읽었다는 죄책감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열의 그 비밀스럽고 커다란 감정의 대상이 성규라는 점에서 오는 질투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양장으로 정성스레 만들어진 일기장의 표지위에 올려둔 손에 힘이 잔뜩 들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의 감정이 이렇게나 멀리 가기 시작한 것일까. 도저히 눈치를 챌만한 변화를 찾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을 소개 시키지 말아야 했던 걸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달려가 친구의 멱살을 잡고 그를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 우리 사이에서 당장 꺼지라고 사자후라도 내 질러야 되는 걸까. 명수의 머릿속은 다시 시끄럽게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그러니까 일기장을 펼쳐보기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고심했던 수제 초콜릿의 레시피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몰려오는 것은 깊은 후회감이다. 왜 하루라도 빨리 그, 성규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서 오는 후회감이다. 아직 서로의 감정에 확인도장을 찍지도 않았는데,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취해 자만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맞다, 그 것은 틀림없는 자만심이었다. 자신을 조금 올려다보는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고, 아주 작은 배려 하나에도 잔뜩 붉게 타오르는 그의 귓바퀴를 보면서 멋대로 자만에 빠지고 말았던 거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두툼하고 무거운 일기장을 책상위로 내 던진 뒤에 명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만을 했다면 그간의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는 것이 옳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오랜 하우스 메이트인 성열의 방 밖으로 나선 명수가 향하는 곳은 단연 자신의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영역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태산처럼 이어진 양도 많이 쌓아올린 책들이다. 그 사이사이를 요령 좋게 빠져나와 등받이가 유연한 의자에 깊이 기대어 앉는다. 사색으로 빠지기에 가장 좋아하는 자세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두 사람을 소개시킨 것부터 잘못 된 일일까? 한결 차분해진 명수의 머리가 내놓는 대답은 ‘아니’ 다. 그와 성열을 서로 소개시키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그와 성열이 만난 것이 명수의 탓이 아니었다. 굳이 두 사람을 소개시켜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둘은 언젠가 만났을 것이고, 통성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무리가 없을 테니 결국 성열은 자신이 방금 읽었던 일기를 쓰는 현재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고 명수는 깨닫는다. 과거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것을. 무의미한 것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차라리 생산적인 것, 그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게 몇 배는 더 나을 것이다.
명수의 관심은 빠르게 옮겨간다. 성열에게서 자신의 짝사랑 아니 어쩌면 양방향일지 모르는 이 마음의 보호가 필요하다. 가까운 미래 언젠가 성열이 고백을 할 마음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결착을 내는 일은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시간을 끌어 봤자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는 사실은 방금 자신이 겪은 참이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일은 별로 달갑지 않다. 명수의 결심은 단호하고 또 빠르게 이루어 졌다. 추진력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핸드폰 메시지를 찍었다.
[내일 시간 있어요?]
빠른 대답을 원하고 보내는 문자가 아니지만 답 문자는 아주 빠르게 되날아올 것이다. 성규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장 처음에 저를 새로 배정된 출판사 담당직원이라 소개하며 명함을 건네주던 대부터 말이다. 귓바퀴는 아주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명함을 사이에 두고 가볍게 맞부딪힌 손끝은 아주 옅은 핏기가 머물렀다. 그 것을 두고 아주 귀여운 분홍빛이라고 생각했었다.
도시 조경 차 줄지어 심어놓은 은행나무 때문에 몰려든 활엽수림 매미들이 우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고 공기는 아주 텁텁한 한 여름의 일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더위에 지쳐 명수의 글은 진행을 멈춘 지 수 주가 지나 있었고, 반년짜리 아주 긴 여행을 떠났던 성열이 돌아오기 까지는 아직 몇 개월이 남은 때였다. 그리고 더위에 지친 명수를 깨우는 것처럼 시원한 금속성을 가득 품은 목소리로 성규는 말을 이었다.
“작가님 팬인데... 영광이에요.”
평소라면 능숙하게 받아치고 웃으며 싸인 이라도 한 장 해서 손에 쥐어주었을 텐데, 더위라도 먹은 모양인지 그 날 명수는 다 죽어가는 눈을 힘겹게 몇 번 뜨고 감기를 반복한 다음에야 그 말에 반응을 했다.
“아, 정말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성에 차지 않는 그 대답은 명수 자신이 두고두고 떠올리며 자책하는 대화 중 하나가 됐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딴 한 마디라니, 작가 타이틀이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진행이 어그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거다. 그때에 명수 자신은 무슨 말을 했건 지금의 결과는 결국 같아졌을 것이다.
[어, 있지. 왜? 원고 보여주게?]
[겸사겸사. 저녁 같이 먹어요.]
그러니 서둘러 친구의 부질없는 마음은 단념시켜주는 게 좋을 것이다. 마음에 확신을 심고 손목에 인연을 묶자. 핸드폰이 다시 메시지를 받았다.
[퇴근하면서 전화 할게.]
글쓰기 더 좋은 질문 712 중 15번째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