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하나

[엘규] 질투

(청)새치 2016. 10. 7. 10:08




*규른 7대죄악 합작 참여글 입니다.


1.

두 팔을 모아 팔꿈치로는 바닥을 지탱하고 손바닥 한 쌍으로는 턱을 받쳐 올린다. 그러면 품이 넉넉한 팔찌는 할 수 있는 만큼 흘러내려간다. 그때 짤랑 거리는 소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고서 하는 일은 아득히 멀고 먼 저 아래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아주 멀고 먼 옛날부터 해 온 일은 대체로 그랬다. 땅을 짚고 서서도 누워서도 그리고 앉아서도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저 먼 아래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일이다. 그렇다고 어떤 의무를 등에 졌거나 이루어야 할 어떤 목적의식이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게 전부인 나날들이 이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내려다보는 것은 아니다. 난 한 사람, 아니 벌써 수 세기 동안 셀 수 없이 환생을 반복해 온 한 사람만을 관찰한다. 그, 그러니까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인 새파랗게 어린 그 아이는 이번 생에서는 벌써 2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애를 보아 온지 몇 세기나 지나 와서 이제야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나에게는 앞으로 남은 억겁의 시간에  대한 한숨만 흘러나오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스러지고 태어나기를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해 왔지만 앞으로는 그 보다도 더 많이 죽고 스러져야 그 애는 지겨운 환생의 고리를 끊어낼 수가 있다. 그러니 그 애를 보는 일을 계속하는 시간도 그 만큼 오래 남은 셈이다. 그 쯤 되니 남은 시간을 굳이 셈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나서는 더욱 할일을 잃어 지루해진 시간을 어쩌지 못하고 나는 하품을 커다랗게 입을 벌려 내 뱉었다.

"니 목젖 튀어 나오겠다."
"남이사"

배를 드러내 놓고 누운 동료를 비난 하면서 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는 소임을 이어간다.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는 그에게 하품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 받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게으르게 천천히 두 눈을 끔뻑거리는 동료의 꼬락서니를 흘긋  보아주고선 그의 한심함을 떠올리지만 그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직속 상사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심기를 거르는 일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리를 옮길 수도 없다. 애석하게도 내 상사는 그 애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남자의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전 잠의 수마를 떨쳐낸 그 애를 나는 다시 내려다본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그 애에게는 아직도 꼭두새벽인 듯 하늘로 뻗쳐 올라간 머리를 수습할 생각도 없이 비척거리며 겨우 침대를 벗어난 참이다. 요 며칠 동안 일이 휘몰아 쳐 새벽까지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움직인 탓이다. 주기적으로 한 번씩 돌아오는 그 때가 되면 그 애는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간에 들어가서 자고 다들 바삐 움직이는 시간에 일어나는 생활을 이어가고는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상사의 담당이 언제나 차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새로이 물들이 머리가 맘에 드는지 씻으러 들어간 욕실 전면 거울 앞에서 아이는 한참 시간을 보낸 후에야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옆에서 상사의 키득 거리는 웃음소리도 함께 들려왔지만 대응해서 좋을 것 없는 그 소리는 그냥 한 귀로 흘러 넘기는 것으로 한다.

"네가 보는 저 애는 참 지 얼굴이 마음에 드는가보다?"
"자기애가 많으면 좋지, 뭐.."
"그래, 뭐.."

그 애의 옆에는 그래 그 남자가 항상 붙어 다닌다. 이번 생에서도 그렇고 지난 생에서도, 그리고 그 전전의 생에서도 남자는 아이의 옆에서 함께 그리고 끊임없이 외모와 직업 그리고 모든 걸 바꾸어 가면서도 포기하는 일도 없이 그 애의 옆에 그렇게 위치했다. 아이보다 더 길고 오랜 고리의 시간을 견뎌 온 그 남자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그 아이와는 다르게 이미 완만하게 성숙을 이루어 낸 그를 보는 나의 마음은 언제나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가슴께를 울컥 하고 치고 올리는 것도 같고 뱃속을 은은하게 감싸 안아오는 것 같기도 한 그 감정의 정체를 나는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했다. 그저 마른 침을 넘기고 가슴께를 꾹 눌러 내리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쉴 새 없이 날뛰는 그 것을 강제로 눌러 다스리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상사는 나를 보고서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난 지금 너 같았던 놈을 아주 잘 알고 있지!"

기분 좋게 껄껄 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웃는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것을 담은 그의 웃음을 나는 아주 찝찝한 것을 느끼며 그저 흘려 넘겨야 했다. 그건 아주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12.

성규는 그랬다. 현재의 자신의 생활이 너무 안온하고 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고 문득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생각하고는 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일부러 선사해 주려고 한 것처럼,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이 난처함 없이 딱 들어맞는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그리고 성규는 그러한 것에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감사 인사를 받아 마땅한 자를 막상 찾아내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그저 아무런 예고 없이 그러한 충만한 감정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올 때 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어떠한 공간에라도 대고 그저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했다.

'고마워요'

그의 감사를 듣고 뜻을 이해하는 누군가, 아니 무엇인가가 존재 한다면 아주 좋을 것이라고, 그저 혼자서 생각하며 기약 없는 인사를 성규는 때마다 흘려 내보내고는 했다. 그러면 누군가 듣고 반응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출처모를 실바람이 성규의 머리를, 그리고 피부를 간질이고는 했다. 그 순간을 성규는 아주 좋아했다. 그의 연인은 그러한 성규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성규의 그러한 기도 같은 의식을 언제나 나직한 미소와 함께 그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을 하였다.

"좋아해요."

그리고 그저 그 미소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성규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직하고 또 달콤한 목소리에 성규는 그저 키득 이며 웃음을 흘렸다.



2.

나는 언제나처럼 지정석에 앉아 나는 아득하게 먼 지상의 어느 곳을 본다. 눈길이 닿는 곳은 언제나 그렇듯 장소가 변하기 마련이고, 눈에 담기는 것도 변하기 마련인데 나의 신경은 언제나 하나밖에 모르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 온통 꽂힌다. 온갖 푸른 것들 아래에서 아이는 커다랗게 파안대소를 흘린다. 무슨 흥미로운 것이라도 접한 것처럼 참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연신 찰싹이는 소리가 온 천지에 뒤덮일 정도로 맞추어 댔다. 무슨 일일까. 하는 다시 한 번 아이에게 집중하면서 주변의 것들을 훑는다.

"아."

그리고 나는 아주 익숙한 모습의 인물을 찾아내고 만다. 남자였다. 온통 푸른 것들 아래에서 아직 색이 진하고 선명한 아이와 금방이라도 고리에서 벗어날 것처럼 투명한 그 남자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사랑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나는 다시 저 아래서 부터 불쑥 치고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삼켜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것은 항상 부지불식간에 치고 올라와 자칫 하면 입 밖으로 모든 내장을 쏟아낼 것처럼 강하고 뜨거운 것을 쳐 올리고는 했다. 그리고 뒤이어 내 뱉는 한숨은 안도의 그 것인지 걱정의 그것인지 알 수조차 없이 복잡하기만 하다. 이건 오래 보아온 아이에게 가져도 되는 지당한 감정인지 조차 알 수가 없어 갑갑한 마음을 한데 모아 한 숨으로 내 보낸다.

"엄청 투명해 졌어."

그리고 나의 사수도 예의 그 감정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말 한마디를 툭 내 뱉는다. 나는 숨을 합 하고 들이키고선 오만상을 찌푸린 얼굴을 했을 것이다. 그걸 다 봤을 텐데 사수는 여전히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특별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을 한다.

"뭡니까?"
"내 담당 말이야."
"아, 네 뭐. 그만큼 많이 살았잖아요."
"그래 뭐.. 아마도 이번 생이 마지막이겠지."
"일 없어져서 좋으시겠어요?"
"뭐 좀 복잡 미묘한 기분?"

전에 없이 아쉬움이 담긴 듯한 목소리를 뱉으면서도 얼굴 표정은 조금도 변하는 일이 없다. 이미 그만큼 오랫동안 일을 해 온 그는 벌써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의 생의 고리들을 보아왔다고 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부류들 중에서도 경력이 상당히 긴 편에 속하리라. 실제로도 은색 팔찌 위에 새겨진 일련번호도 자릿수가 많이 적었다. 워낙에 말을 가벼이 하는 성정 탓에 그 사실은 자주 잊히곤 했지만, 한 번씩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오랜 경력을 은근히 내비치고는 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한 얼굴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근데 말이야."
"네.."
"네 저 꼬맹이는 짝을 잃어버리게 된단 말이야."

나는 그만 입을 다물지도 계속 벌리지도 못하고 애매하고 뻐끔 거리기만 했다.



8.

성규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선명히 가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유난히 해가 밝은 날이었고 그 해에 처음으로 소매가 짧은 교복 셔츠를 챙겨 입은 날이었다. 깨끗하게 드라이 돼 옷장에 잠들어 있었던 교복은 이리저리 움직일 때 마다 까슬하게 속살을 쓸어서 약간의 불편함과 함께 조금의 풋풋함을 품었던 날이기도 하다. 감이 얇은 셔츠 위로 늘 가지고 다니던 백팩을 메고서 성규는 약간 당당하게 정류장 앞에 섰다. 바쁜 아침 시간에 씽씽 달리는 많은 자동차들 사이로 초록색이나 파란색 따위의 버스들이 듬성듬성 섞여 달렸다. 몇몇 개는 성규가 서 있는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추었으나 정작 기다리는 버스는 앞으로 도착하려면 5분은 더 기다려야 되는 이상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많지 않은 정류장의 벤치에 고요히 자리 잡은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주 어린 남자애가 하나 덩그마니 자리하고 있는 것도 말이다. 등교 중인 듯 그 아이는 자신의 것 보다 크기가 작은 백팩을 앞으로 메고 앉아 콘크리트가 얼기설기 엉킨 넓은 도로를 빤히 보다가 들어오는 버스 보기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저 정도 나이 되는 애가 이렇게 혼자 다니기도 하던가? 하는 의문을 잠시 떠올렸던 머리는 계속해서 확장하여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아이의 보호자를 헤아리는 지경에 까지 이르기 시작한다.

"형아"
"어, 엉?"

아들을 챙겨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아침을 보내는 워커홀릭 엄마의 나 홀로 육아기 같은 것들을 떠올리던 성규는 갑작스런 부름에 정말로 화들짝 놀라 대답을 했다. 검은 머리, 그리고 검은 눈망울의 아이는 다른 데도 아니고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맑게 빛나고 또 말간 빛을 머금은 얼굴과 눈망울이라고 생각했다. 반짝 하고 빛나는 눈동자에 성규의 모습이 맺혔고, 아이는 방긋 하고 웃었다. 실로 그 낯빛과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578* 버스가 00 초등학교로 가는 게 맞아요?"
"어, 엉.."

아주 익숙한 버스의 노선과 함께 아주 익숙한 초등학교의 이름을 들으면서 성규는 넋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아이는 다시 '감사합니다아!' 하고 끝이 주욱 늘어지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거기에 다시 한 번 성규의 고개는 쉽게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의 말은 생각지도 못하게 아주 쉽게 내 달렸다.

"같이 가 줄까?"

다시 고요히 곧게 와 닿는 아이의 시선에 큼큼 호흡을 다듬은 뒤에 침착하게 뒤의 말을 이어 나간다.

"우리 학교 그 초등학교 바로 옆이니까."
"감사합니다아-"

다시 말 끝이 길게 늘어지는 감사 인사를 들으면서 성규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4.

나의 관심은 온통 아이에게로 쏟아진다. 대체로 연인과 함께 거리를 노닐거나 가벼운 스킨십 같은 것들이 계속 됐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아이를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랬다. 그리고 나는 흘리듯이 알려온 사수의 그 말을 잊지 않고 자꾸만 곱씹으면서 글자 하나 그리고 또 하나를 헤쳐서 속으로 씹어 넘겼다.

"너네 저 꼬마 애는 남은 생의 개수를 모두 홀로 살아갈지도 모르지, 물론 새로운 반려를 찾지 못했을 때의 얘기야. 그런데 만약에 홀로 남아 환생을 이어갈 저 애는, 지금만큼 행복한 생을 이어갈까?"

하나의 생과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생을 혼자 살아갈 아이를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연인과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또 다시 언제나 함께 노닐던 거리를 혼자 걷고 매번 그들의 관계처럼 한데 얽어 잡고 잡히곤 하던 아이의 텅 빈 손을.

그리고 쿵- 하고 저 아래 깊숙이 심해로 떨어지는 나의 속내가 무언지 나는 답을 내릴 수가 없다.



9.

그 작고 어린 아이의 이름은 명수였고, 집은 바로 성규가 사는 곳의 바로 옆집이었다. 아주 반가이 오가는 인사들 속에서 그들이 얼마 전에 이사 왔음을 알 수 있었고, 명수는 제 엄마의 옆에서 성규에게로 아주 선하고 순진한 눈빛으로 인사를 해왔다. 그 것은 몸이 모두 자란 후에도 변하지 않는 명수의  전매특허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성규가 아주 좋아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3.

아이는 전에 없이 격렬한 감정을 쏟아냈다. 연인과 나누는 말은 전에 없이 날카로운 각이 섰고, 함께 이루어지는 손짓 따위는 아주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위협 당했다. 주체 할 수 없는 감정들은 모두 밖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듯 아이는 저에게 가득 차오른 것들을 끊임없이 흘러 내 보내며 연인에게 보였다.

'나의 속도 내 마음도, 모두 보아주고 인정해줘.'
이번 생에서의 아이는 그런 표현을 유감없이 할 줄 알았다.

"난, 네 모든 걸 알고 있는데 말이야.."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아이에게의 대답처럼 술술 내뱉은 혼잣말에 나는 그만 생각을 멈추고 복잡하게 엉켜 들어가던 감정들을 단번에 잡아 풀어낸다. '나는 너의 연인과는 다를 거야' 라는 듯이 흘러나온 그 말의 뜻은, 그러니까 간헐적으로 온몸을 떠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달래주는 것을 떠올리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잔뜩 모아든 아이의 눈썹 사이와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선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것은 아이에게 품어 마땅한 감정이 아니었다. 아니, 아이에 대한 애정은 지당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아이의 연인에게 가지는 감정은 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의 짙은 애정과 다른 한 인간에 대한 어둡고 깊은 질투심이 함께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5.

나는 그 남자의 남은 생을 헤아렸다. 내가 열렬하게 바라보는 그 아이의 연인의 것을. 그건 아주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별다르게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거나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데, 나의 계획은 비밀스러운 편이 여러모로 좋았기 때문이다. 나의 사수도 모르게, 그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여 나 혼자만의 일이 되는 편이 옳았다. 그리하여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가장 적당한 시기를 고르고 나는 그 결행일 만을 기다리며 앞으로 남은 시간을 죽일 것이다.

나는 지상으로 그리고 아이의 자리가 있는 그 곳으로 모든 신경을 내린다. 이미 모든 성숙을 이루어 낸 아이의 연인은 금방이라도 그 지긋지긋한 반복을 끊어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을 아주 태연하게 맞이할 것이다. 이 결심은 아이에게 품은 나의 짙은 감정과 인간에게 품었던 단 한 번의 어두운 감정이 만들어낸 늪이 될 것이다. 결국 나를 끝도 없는 아래로 내려 앉힐.



10.

옆집 아이 김명수가 교복을 입기 시작했을 무렵 성규는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때 가지 두 사람은 두꺼운 벽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에서 사는 이웃사촌인 채였다. 이전만큼 함께 하는 시간은 길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아침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시간, 그리고 학교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등교직전까지의 시간은 언제나 변함없이 얼굴을 마주했고,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서로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서 그 복잡하고 번잡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고요히 온전히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성규의 마음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명수는 그렇게 생각했고 아침의 그 시간과 함께 움직이는 공간들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묘하게 변하는 자신의 감정들을 명수는 아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나 어리고 세상물정 몰랐던 옛날의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가슴도 머리도 아주 천천히 물들였기 때문이다. 그 매끈하고 오밀한 얼굴을 볼 때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옅은 미소나 간지럽게 퍼지는 말랑한 감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명수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들였고 아마도 결실은 곧 맺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6.

나는 허연빛이 흘러넘치는 문 앞에 섰다. 저 곳을 지나면 나는 공중으로 흩어져 다시 아주 작은 덩어리가 될 것이고 아주 긴 억겁의 시간들이 앞을 기다리겠지. 나는 감당 해야 되는 그 것을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하지만 기꺼이 나의 업보로 품을 준비가 돼 있다.

문 앞에는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은색 팔찌들이 발에 치일만큼 쌓여 있었다. 나는 실소한다. 그리고 한발자국 더 빛무리 안으로 헤집어 간다.



11.

명수의 고백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듬해 2월 성규의 졸업식에 이루어졌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 순간에 두 사람은 아귀가 맞아드는 것처럼 꼭 들어맞는 아늑함과 안온함을 느꼈다.



7.

문은 흘려 내보내던 빛에 밝기를 더하여 크기를 키웠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툭 하고 떨어진 은색 팔찌가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