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하나

[현성] 늑대여우

(청)새치 2016. 2. 23. 02:41

2011.11.22





현실적으로, 야생에서의 먹이사슬에서 늑대는 여우보다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우 따위가 늑대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거창하게 먹이사슬을 찾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늑대 남우현을 여우 김성규가 이겨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본능적으로 늑대가 저 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늑대를 여우가 이길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김성규가 남우현을 피하고 있는 지금의 행위를 정당하게 보이게 할 수 있는.


발단은 미팅이었다. 성규의 대학 동기가 자리 하나가 모자라니 제발 협조를 좀 해달라며 빌어 온 것이 사건의 원흉이었다. 기본적으로 평범한 모럴을 지니고 있는 성규는 당연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약혼자가 있으니 곤란하다' 말하는 성규에게 그는 '세상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옛날사람 마냥 네놈 나이에 약혼이냐' 며 핀잔을 줄 뿐이었다. 성규는 그 동기에게 굳이 설득의 화법을 쓰기를 포기했다. 이 세상에 반류라는 것이 있고 나는 반류이니까 종족의 번성을 위해서 일찌감치 약혼을 하고 블라블라 하는 것을 설명할 용기도 없을 뿐더러, 십중팔구 증거를 보이라고 할 그에게 유일하고도 간편한 증거인 혼현을 보이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래서 그렇게 끌려 나갔던 게 문제가 된 것이었다. 왜냐면 약혼자인 우현이 그 사실을 알아버렸으니까 말이다.


우현은 성규에게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현이 성규에게 무뚝뚝하다거나 데면데면 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만나온 우현은 자신들의 약혼이 성사되던 열 살배기의 그 시절부터 성규에게 한없이 친절하기만 했다. 입에 쓴 말 한번, 화 한 번 내 본적 없는 우현은 이번에도 단지 자신도 모르게 성규가 미팅에 나갔다는 것으로 화를 내진 않을 것이었다. 다만 그동안의 우현의 행동이 약혼자라는 위치에서의 기본적인 매너인 것인지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류들은 어딘지 모르게 고지식한 데가 있었다. 세상은 바뀐 지 오래였다.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없다는 표어가 길거리에서 발에 채는 돌멩이 개수보다도 많은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반류들은 저마다의 종을 잇기 위해 일찌감치 친한 집안에 적당한 배우자를 점찍어 놓고 정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규와 우현은 그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서 약혼을 하였다. 마침 친밀하게 지내고 있던 두 집이 적절한 상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이 흐름이면 아마도 몇 년 뒤에는 상견례까지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었다.


어떠냐고 굳이 물어본다면 성규는 우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니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건 단순히 약혼자라는 위치에서의 의무적인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부모님 지인의 아들이라며 소개받았던 5살 시절에 가졌던 두 뺨을 발그레 상기시켰던 순수한 기쁨의 감정은, 혼인을 약속하던 10살을 지나, 대학에 입학한 21살의 성규의 가슴을 간질이는 곰살스런 분홍빛의 감정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약혼반지를 나누어 끼었던 아이는 웃는 모습이 서글서글하고 잘생긴 청년이 돼 있었다.


성규가 만났던 여자는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이제 갓 20살을 넘긴 신입생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를 얌전하게 내린 채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는 이름이 소연이라고 했다. 자기소개를 하며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를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 제법 풋풋해 성규는 잠깐 동안 설렘의 감정을 느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소연이라는 여자아이의 어깨 너머로, 같은 카페의 다른 테이블에서 팀 과제를 하는듯한 모양새의 우현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대학에 입학 했더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더라 하며 조곤조곤히 말 하는 소연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잠깐씩 그녀의 어깨너머로 훔쳐본 우현은 모아둔 자료를 읽는데 정신이 팔린 듯 바빠 보였다. 깊은 생각에 빠질 때마다 버릇처럼 나오는 살짝 기울어지는 그 고개를 한 번, 제 앞에 있는 하얗고 아담한 소연을 한 번, 번갈아 본다. 그러고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실 우현은 소연 같은 여자아이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아무리 반류라고 하더라도 번식은 동성 간보다 이성간의 관계가 더 용이했다. 만약, 소연이 단순한 원인이 아니라 반류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우현의 곁에 적절한 반류 여성이 있었다면 우현의 약혼자는 저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반류가 아니라 몰래 만나는 여자가 다면...... 정략결혼이 일반적인 반류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었다. 성규의 뱃속에서 불편함과 걱정의 감정이 뒤 섞여 회오리 쳤다.


성규의 시선중 절반이 제 어깨 너머로 향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소연은 한참을 재잘대다가 잠시 실례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드르륵 하는 의자소리와 함께 갑자기 확 트이는 성규의 시야 속에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우현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우현을 성규는 같이 바라보며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천천히 굴렸다. 푼푼하게 맞는 반지는 거슬리는 데가 없이 성규의 손가락에서 굴렀다. 그리고 그 것은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 덕에 멈추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우현의 문자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걸까. 아직 소연이 돌아오지 않은 빈 의자 너머의 우현은 다시 프린트 물로 관심을 돌린 듯 했다. 다시 고개가 기울어진 우현을 바라보며 성규는 문자 전송버튼을 꾹 하고 눌렀다.

나중에.

아직도 확 트인 시야 속에서 우현은 제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다시 성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없는 눈빛으로 성규를 바라보고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 하고는 다시 프린트 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성규는 다시 제 손가락의 반지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우현의 속내를 정면으로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여우인 자신은 늑대인 우현을 이길 수 없었다.

그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우현이 자신의 다른 애인의 존재를 알려온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나는 이거 로코물로 쓰고 싶었능데..........

* 물풀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04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