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하나

[현성] 반짝반짝

(청)새치 2016. 2. 23. 02:46

2011.12.31


에피톤프로젝트 :: 환절기





떨어졌어.

높낮이 없는 말소리 뒤에 붙어 들려오는 깊은 한숨, 그리고 툭 하고 터지듯 공기 중으로 산란하는 하얀 입김과 말랑한 두 볼을 베어낼 듯 할퀴고 지나가는 찬바람. 평생 동안 겪어온 겨울은 언제나 차가웠고, 냉정했으며, 잔혹했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던 저 깊은 속부터 타고 뱉어진 성규의 바람소리처럼 우현은 깊은 숨을 내 뱉었다. 전화기 저 편이 조용했다.

지금 어디에요.






반짝반짝









안녕하세요. 남우현입니다.

고개를 푹 수그렸다가 바로 세우자 머리 위에서 그래, 안녕. 하고 공간을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였다. 깜빡깜빡 작은 눈이 파드득 거리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작아 보이는 눈을 더 게슴츠레 뜨고 이리 저리로 움직이는 그의 시선은 우현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명백한 경계의 눈빛. 이라고 우현은 생각했다. 호의적이지 않은 상대를 탐색하는 경계의 눈빛. 머리 꼭대기부터 시작해서 얼굴, 그리고 어깨와 허리 그리고 발끝까지 훑고는 다시 얼굴. 너무 크지도 않게, 너무 작지도 않게 뜬 눈이 우현의 눈을 보았다. 깜빡깜빡 이번엔 우현의 축 처진 눈이 파드득 거렸다.

난 김성규.

담백한 목소리와 함께 내 민 하얀 손은 끝끝마다 자홍색으로 물들어 우현에게 인사 하는 것 같았다. 안녕, 하고. 화들짝 놀라며 얼떨떨 결에 잡은 손이 따뜻했다. 끝끝마다 물들어 있던 예쁜 색이 더운 기운과 함께 우현의 왼쪽 가슴께 까지 단번에 번져 들었다.

"그러니까 성규형은.. "

말 하는 준석을 우현은 더욱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성규는 회사에서 신경 써서 키우는 중이라고 했다. 그 형이 좀 묘한 데가 있잖아. 안 그래? 아직 모르려나? 라고 말하며 준석이 미간을 근엄하게 찌푸렸다. 연습실 벽에 눌려 여기저기로 뻗친 머리를 바라보며 우현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똑 부러지지 않고 좀 묘한 구석이 있었던 것도 같다. 우현의 작은 머리통이 급하게 움직인 것을 보고서 금세 풀린 표정이 이번에는 가볍게 변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현보다 몇 개월 먼저 들어왔다던 동갑내기 준석은 그 특출난 붙임성 덕에 여기저기 주워들은 게 많다고 했다. 그리고 들은 대로 우현에게 나불나불 얘기를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알겠으니까 빨리 말 좀 해 보라고 재촉하자 이번엔 에헴 하는 헛기침 까지 하면서 날렵한 턱을 당긴다.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그러니까 성규형은 일단 데뷔는 할 건데 문제는 솔로냐 팀이냐 그거라는 거지. 난 성규형이랑 같이 데뷔 하고 싶다. 그러고는 준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구.. 하는 말이 턱까지 올라왔다가 꾹꾹 내려갔다. 그 말이 절반정도의 진심을 담은 바람이란 것을 우현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떠오르는 상상 속에서 무대 위에 성규와 함께 선 준석의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함께라면? 꽤 괜찮은 트리오지 않을까? 도화지위에 그림을 그리듯 무대 위의 세 사람을 그리던 우현은 흑백의 밑그림이 그려질 즈음 고개를 설렁설렁 저어 지워버렸다. 데뷔나 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바로 코앞에 닥친 춤 레슨이 더 걱정이기는 했다. 자그마한 한숨이 우현의 입을 비집고 나온다. 밝지 못한 미래는 알고 있다. 그래도 데뷔는 하고 싶다. 이왕이면 성규와 함께였으면 좋겠다.

사실 첫 만남 이후로는 성규를 다시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 들어가도록 짜인 레슨 시간들 중에서 성규와 겹치는 시간은 단 한 시간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맞아 들어가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현이 성규를 만나는 것은 스치듯 지나가는 불과 몇 초간의 순간뿐이었다. 인사를 하듯 고개를 한번 꾸벅 하면 미묘한 눈빛과 함께 같이 고개를 끄덕 해주기까지 걸리는 시간 10초. 그리고 우현의 심장박동수가 가장 빨라지는 10초. 그 것이 우현과 성규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우현은 첫날에 보았던 성규의 그 경계의 눈빛이 조금은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날에 보았던 성규는 약간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연습 시작한다!!"

잠깐 동안의 휴식시간이 끝나면 다시 비트가 빠른 음악에 몸을 맡겨야 했다. 도무지 유연하게 맡겨지지 않는 몸뚱이를 이끌고 다시 전면거울 앞에 선다. 이리 움직여보고 저리 움직여봐도 어딘지 어설펐던 제 몸을 향해 욕지기를 내 뱉으며 우현은 자리에서 밍기적 거리며 일어섰다. 준석은 벌써부터 안무가 옆에서 있는 아양 없는 아양을 떨어대고 있었다. 커다란 전면 거울은 언제나 부담스럽게 우현을 내려다본다. 대여섯 정도의 연습생들과 마룻바닥이 거울에 비쳤다. 그리고 통유리로 짜인 출입문 너머로 지나가는 머리통 하나가 전면거울 귀퉁이에 비쳤다가 꽉 막힌 벽 뒤로 사라졌다.

빠르게 흐르는 음악 속에서 우현은 기계 같은 움직임을 간신히 따라가며 그 귀퉁이를 몇 번이나 흘끗 거렸다. 귀퉁이에 잠깐 비추었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서 우현의 눈에 채인 탓이었다. 뒷목을 짧게 덮는 밝은 갈색의 머리칼과 하얀 얼굴 위에 얇고 붉은 입술, 그리고 쌍꺼풀 없이 가늘고 길게 뻗은 눈매였다. 손에는 하얀 종이를 들고 보컬 연습을 가는 듯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작은 입과 덤으로 경쾌한 발 디딤.

색이 참 다채롭다, 고 우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것은 자홍색으로 물들어 있던 손끝과 끝.


그런 날이 있었다. 뭘 해도 마음에 차지 않고 제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마이너스 감정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날. 우현은 저가 들고 있는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종이위에 까맣게 박혀있는 글자들과 연필로 여기저기 메모해 둔 것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한숨이 푹. 눈으로 훑은 가사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입으로 읊조려본 가사는 입 안에서 헛돌았다. 이 상태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될 대로 되라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바닥에 팽개치고는 그 위로 털썩 누워 버린다. 있다가 춤 연습도 조금 해야 되는데...연습실 천장의 형광등이 눈부시게 빛났다. 저거 하나에 전기세가 얼마더라..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형광등 개수를 하나 둘 헤아리다가 저쪽 끝에서부터 아련히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새벽시간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우현 하나뿐일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기회는 많아진 다는 것을 뼛속까지 알고 있는 이들은 많았다.

복도 끝에서부터 자그맣게 토닥토닥 하고 울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우현의 귓가에 들렸다. 그리고는 스르륵. 기름칠이 항상 잘 돼 있는 문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린다. 그 문 틈새로 빠끔히 들어오는 것은 갈색 머리통이었다. 연습실 안으로 들어온 머리통이 무얼 찾는 듯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다가 멈칫. 복도에 걸쳐 있던 발이 들어오고 문은 다시 스르륵하고 소리 없이 닫혔다. 그리고는 다시 토닥거리는 발걸음이, 이번에는 연습실 안에서 울린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연습..했어요."
"너 그냥 쉬라고 했다더니."

아까 희연누나가 그러던데.. 하는 말을 덧붙이며 우현의 머리맡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눈 부시는 형광등 불빛이 성규의 머리 뒤에서 빛났다. 성규의 눈이 우현의 얼굴을 한번, 그리고 우현에게 깔려있는 하얀 종이로 갔다가 다시 우현의 얼굴로 돌아왔다. 작은 눈은 도르륵 도르륵 움직이는 모양새도 잔잔했다.

"너 오늘 아무것도 안 되는 날이라매.."
"......"
"어디가 문제야?"

선생님들이 다 네 얘기만 해대서 내 귀에 딱지 앉을 거 같잖아. 하면서 우현의 옆에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처진 눈썹이 한번 움찔 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첫 인사 이후로 가장 긴 시간을 경신했다. 우현은 다시 제 위에서 빛나는 형광등 불빛을 피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성규의 앞으로, 성규를 마주보며 자리를 잡았다. 우현에게 깔려있던 종이가 잠깐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뒤집어졌다.

"형한테..내 얘기가 들어가요?"

둘 사이의 공간을 채우며 바짝 들어오는 우현을 보고선 성규의 눈썹이 한 번 움찔 하면서 몸이 뒤로 빠졌다. 꾹 다물린 입술이 아담하게 다시 한 번 움찔.

"너 노래 잘한다는 소리 듣느라 내 귀가 아플 지경이야"

그러고는 미간에 주름이 두 줄.

우우와아!!!!!!!!
난데없이 탄성과도 같은 괴음을 지르며 바닥에 드러눕는 우현을 보며 성규는 다시 움찔 하며 제 몸을 뒤로 뺀다.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우현은 제 양팔을 연습실 바닥에 탕탕 하고 쳐 댔다. 나보고!! 노래!! 그것밖에 못하냐고!! 욕 했으면서!!!! 연습실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와는 다르게 자꾸만 호선으로 드러나는 치아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을 연습실 바닥에서 바동거리다가 갑작스레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이유 없이 고개를 바닥으로 푸욱 수그린다.

"야..뭐야."

성규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는 더 바닥으로 처졌다.

"야."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 이번엔 양 손이 얼굴로.

"야!"
"자꾸 부르지마요. 부끄럽게 스리."

쥐꼬리만 한 대답에 부끄러운 줄은 알아? 하고 성규가 묻자 자그맣게 끄덕끄덕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귀에 열기가 훅 끼치고 가슴께가 간질간질 콩닥콩닥 뛰었다.

사실은 성규에게 제 소식이 닿고 있다는 게 부끄럽고 벅차서.

*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성규가 어디에 있을지는 알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린 골목길로 나온 우현의 발걸음은 꽤 강단이 있게 움직였다. 몇 개인가의 익숙한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돌아 가다보면 나오는 그 곳. 검은 장막 아래로 반짝반짝 거리는 별빛이 흘러내리는 곳이 있었다. 그날의 말랑말랑했던 감촉과 오래된 금속성의 소리와 모든 게 멈추어버리는 정적과 그리고 톡, 톡, 토옥. 아직도 생생한 그 날의 감정과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곳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현은 주머니속의 핸드폰을 잡으며 목도리 안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다시 떠오르는 달콤한 기억.

*

그 날 밤에 성규는 얼굴이 시뻘게진 우현의 손을 잡아끌고는 건물에서 조금 먼 놀이터에 갔었다. 손끝마다 예쁜 색으로 물든 손이 우현의 손을 잡고, 토닥토닥 거리는 발걸음으로 어두운 길을 헤치고 잘도 걸었다. 반발자국 뒤에서 끌려가는 우현은 자그마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같이 타박타박 하고 걸었다. 엇갈리는 두개의 발걸음 소리마저도 달콤했다. 그리고 몇 개인가의 골목 모서리를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다 왔다"


어둠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자그마한 놀이터.

"뭐에요?"
"뭐긴 뭐야 놀이터지."


무심하게 뱉는 말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우현의 손을 빠져나간 손이 성규의 양 옆에서 허공을 휘적휘적 저었다. 그리고는 그네에 털썩. 오래된 그네 줄이 삐걱 거리며 출렁였다.

"뭐해 안 앉아?"

성규의 손에 잡힌 빈 그네가 출렁 거리며 흔들렸다.

"뭐하게요?"
"별 보는 거야."
"별요?"
"엉"

발로 땅을 툭툭 차면서 그네를 앞뒤로 끌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고개는 저 높이 하늘로 치켜든다. 아치 모양으로 펼쳐진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별 봐서 뭐해요?"
"내 꿈이 잘 있나."
"꿈이요?"
"응"

저기 하늘에 내 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는 저 별잡이가 되는 거야. 내가 저 별을 잡으러 가는 거야. 반짝반짝 빛나는 내 별. 아직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성규의 눈이 반짝반짝 거렸다.

"형.."
"엉??"
"제 하늘에는 형이 반짝반짝 거리는데..."

앞뒤로 밀리던 그네가 우뚝 하고 멈추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 시선이 우현에게로, 우현의 눈에 맞추어 온다. 그넷줄을 꼭 쥐고 있는 하얀 손이랑 꾹 다문 입술이랑 그네 밑바닥을 꾹 쥐고 있는 발의 신경이 모두 다 저에게 쏠린 것만 같아 우현은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그리고는 정적...정적...정적...

삐걱거리는 소리도 멈추고 땅을 박차는 소리도 멈추어 버린 조용한 놀이터에서 그네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두 명.

소리도 시간도 멈추어버린 것만 같은 그 공간을 먼저 깨는 것은 우현이었다. 서로 교차하는 시선 그대로 땅을 딛고 있던 발을 살곰살곰 움직여서 옆으로 옆으로 옆으로 가면 그네 줄을 꼬옥 잡은 성규가 눈알을 열심히 도르륵도르륵 움직인다. 1초 2초 3초 4초 5초 딱 5초였다. 우현이 성규의 바로 코앞에 닿기까지. 이리저리 헤매는 시선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이번엔 깜빡깜빡 눈꺼풀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가슴이 쿵쿵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거렸다. 5센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성규의 오른쪽 눈에 톡. 얼굴 한 가운데에 예쁘게 뻗은 콧잔등에 톡.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담하게 꼭 물린 입술에 토옥.

평소보다 배는 더 커진 눈을 바라보며 좋아해요. 라고 속삭이는 제 목소리를 들으며 우현은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촉촉하고 탄력 있는 입술의 여운이 남아 간질간질 거렸다. 그리고는 푸욱 고개를 수그리고는 다시 정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채로 한참을 있어야 했다.

*


- 뭐해요?
                        노래연습 너는? -
- 나도 노래연습요 ㅋㅋ
                                돋네ㅋㅋ -
- 왜요?
                                그냥ㅋㅋ -
- 아 뭐얔ㅋㅋ
                   연습이나 하셔ㅋㅋ -


피식피식 웃으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준석이 봤으면 여자라도 사귀냐며 추궁을 해 왔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준석은 보컬 선생님한테 신나게 혼나는 중이었다. 잔뜩 쪼그라든 준석의 어깨가 조금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연습 좀 하라니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는 A4지를 내려다본다. 눈으로 훑어보기만 해도 가사가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렀다. 기분이 좋다.

연애감정이란 게 신기했다. 하루하루 새로운 감정이 저 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온종일 피식피식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갈색 머리칼, 가늘고 길게 내 달리는 눈이라거나 촉촉하게 젖어있는 붉은 입술이라거나 곤란할 때마다 축 처지는 눈썹, 요소요소가 다 하나같이 설레어서. 우현은 한 번씩 비식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정말로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몸 밖으로 흘러넘칠 것 같았다. 그래서 드르륵 하고 울리는 문자알림 진동에도.

              나 레슨 있다 일곱 시에 -
              끝나

글자만 보이는 문자에도 우현은 무심코 깊은 감동을 받고 만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우현은 다시 발라당 누워 형광등 개수를 헤아렸다. 콧노래도 조그맣게 흥얼흥얼 거리며 콩콩 뛰는 가슴의 느낌을 즐기면서 발끝도 까딱까딱.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설레어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말고 소리죽여서 키득키득 웃었다. 조금 있다 일곱 시에 나타날 얼굴을 생각하면서 다시 노래를 흥얼흥얼. 그리고는 복도에서 들리는 토닥토닥 거리는 소리에 우현의 노랫소리는 뚝- 하고 끊긴다. 그리고 우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

"오래 기다렸지?"

하고 갈색 머리통이 들어오는 것이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하고는 몸을 잡아 끌어 입술에 한번 토옥. 화르륵 하고 얼굴에 올라오는 붉은 기를 보고서는 함박웃음과 함께 제 품 깊숙이 포옹. 그러면 레슨시간 동안 올라가서 미처 떨어지지 못한 체온이 사르르르 하고 우현에게 그대로 퍼져왔다. 얼떨떨결에 같이 우현의 등을 감는 손의 온기가, 체온이 너무나 좋아서 우현은 또 뭉클.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흘린다.

우현과 성규의 연애는 조심스러웠지만 비밀스럽지는 못했다.



평소처럼 레슨이 모두 끝난 빈 연습실이었다. 평소처럼 빈 공간이 없이 붙어 성규의 입술에 톡톡 꾸욱..제 입술을 깊이 묻었다. 딸기향 립밤의 잔향이 우현의 들숨에 같이 빨려 들어왔다. 달큰한 향기로운 딸기향. 아담하고 붉은 입술에 딸기향 립밤. 그 오묘한 조합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혀를 내어 아직 딸기향이 남은 성규의 입술을 핥았다. 놀란 성규의 반응이 채 나타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묻고 성규의 혀를 옭아매었다. 치아 이곳저곳을 톡톡 건드리며 이리저리로 도망 다니는 성규를 따라 입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 사이에 바르작거리는 성규의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깍지를 끼고. 달큰한 딸기 향을 깊이 들이마실 때였다.

"너네 뭐하니..?"

후다닥 떨어진 우현과 성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CD케이스를 들고 있는 보컬트레이너였다.

일은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가 됐다. 폭탄을 떠안을 수 없다는 회사는 성규와 우현을 회사 밖으로 내 몰았고 약자인 성규와 우현은 회사 밖으로 나왔다. 모든 일을 비밀로 해 주는 것은 마지막 의리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도 같았다. 연습실에서 갑자기 사라진 둘에게 처음 며칠간 의문을 단 전화가 자꾸만 걸려왔었다. 그러면 둘은 그저 사정이 생겼노라 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오지 않게 됐을 때, 성규와 우현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마주보며 웃었다. 다 잘 될 거야. 하고.

*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그네를 보고서 우현은 깊은 숨을 내 쉬었다. 익숙한 뒤통수가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삐걱 거리는 그네에 앉아 양 손으로 그네 줄을 꼭 쥐고 두 눈은 하늘 보며 두 발로 땅을 박차는 그에게로 우현은 다가간다.

"뭐해요?"
"별구경"

돌아보지도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성규의 옆에 털썩, 우현이 빈 그네에 주저앉자 오래된 그넷줄은 삐걱 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때요? 반짝반짝 해요?"

이번엔 대답이 없이 끄덕끄덕, 고개가 움직였다.

"....그리고 너도.."

가로등 불빛에서도 다 티가 나게 붉어진 성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하늘만 바라보는 그 붉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우현도 제 발을 쿵, 하고 바닥에 굴렀다. 그네가 앞으로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성규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형. 제 하늘에선 형이 반짝반짝 빛나요!"




* 물풀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04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