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분량.
그의 출근 후 일과는 할당받은 업무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라커와 레스트룸으로 함께 쓰이는 공간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그를 포함한 근무자들의 이름이 테이블 번호와 함께 나열돼 있어 그것으로 대부분의 업무 난이도가 판가름났다. 그리하여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화이트보드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로 손꼽혔다. 화이트보드 앞에서 몇 분간의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 용납되는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다.
지수연, 화이트보드에 적힌 그의 이름 석 자 아래에 함께 딸려 있는 테이블 번호와 예약자 리스트에는 눈에 익은 이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업무 내용도 쉽게 예상이 되었다. 이를테면 몇 개월 전부터 얼굴을 트게 된 모 중견기업의 사모님은 모든 음료가 너무 차갑지 않아야 하고 언제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으로 근처를 지날 때마다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정도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정도다. 그리하여 그, 수연은 하루 동안 수발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심각하게 훑어야 했다. 그리고 리스트의 딱 중간 정도 즈음, 강렬한 인상의 이름에 주의를 두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수연이 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도 익히 들어 알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이름이 한가운데에 그렇게 있었다. 그것도 수연의 타임이 시작되는 직후 받아야 하는 손님이다. 호피를 두르고 다니는 토끼 사모님이라는 별칭이 더 익숙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이름은 한명희다..
“다음 주에 우리 큰아들이 여기에서 선 볼 거야.”
큰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수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면서 작은 명함도 하나 손에 쥐여 주었는데, 그 속내도 다른 게 아니라 자기 아들이 자리를 제대로 찾아 왔는지 확인을 시켜 달라는 뜻인 게 뻔히 보였다. 아무리 혈통을 중요시하고 보수적인 반류들이라고는 해도 요즘의 젊은 도련님들은 어쩔 수 없는 신세대들인지라 아직 철이 덜 든 어린 아가씨, 도련님들이 집안에 반기를 들고 반항을 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소문은 그쪽과 연이 없는 수연의 귀에도 가끔 들려왔다. 그러니 자신의 손에 쥐어진 명함의 존재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것도 고객유지 서비스 중 하나로 여긴다면 별 일도 아니기에 수연은 자신의 핸드폰에 명함 속 번호를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흔한 이름 중 하나를 골라 저장해 두었다. 인증사진도 함께면 좋을지 모르겠으나 그저 제대로 왔다는 문자만 보내도 저쪽은 만족해할 것이다. 그 정도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의 큰아들이라면 아주 유명했다. 잘난 인물과 잘난 그의 능력으로. 얼마 전에는 수연 자신도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과의 작업으로 또 한 차례 유명세를 치른 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덤으로 그를 비롯해 그와 선을 볼 누군가를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심지어 감사한 마음으로 해 볼만 한 일이다.
“수연씨 10분 뒤 한명희 님 예약방문 예정입니다.”
“네”
입구 데스크의 무전에 답을 하며 수연은 유니폼에 팔을 꿰 넣었다.
*
먼저 등장을 한 것은 멀끔한 옷차림을 한 한명희 여사의 큰아들 김명수였다. 국내에서는 흔치 않다던 검은 털을 두른 표범이라고 한참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니 그 콧대 높은 한 여사도 그렇게 싸고돌며 자랑하고 다닌 것일 테다. 그 모친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 탓인지 그 자신 역시 흠 하나 없는 미모나 능력을 두고 두고두고 회자하기 다반사였던지라 그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깊이 허리 숙여 맞이하는 수연의 인사를 받아주는 손짓에서도 그 후 수연의 안내를 따라나서는 느릿한 발걸음에서도 물씬 풍겨 나왔다.
“예약하신 자리입니다.”
앉기 편하게 살짝 빼 놓는 의자에 앉는 움직임마저 군더더기가 없다. 아마도 원래 그런 성격일 테다.
“식사는 일행 오면 할게요. 그냥 물이나 한잔 가져다줘요.”
정말로 그런 마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찮은 듯 휘휘 내 젓는 그의 손짓을 따라 수연은 그저 처음과 같이 깊이 숙인 인사와 함께 자리를 물러날 뿐이다. 물론 ‘영희’ 라고 저장 한 새 연락처로의 문자는 잊지 않았다.
*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미안해하는 얼굴에는 정작 그다지 큰 미안함을 담지 않았고, 그 정도의 시간 지연에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음을 서로 잘 알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실로 쿨하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앉는 것에 큰 무리를 느끼지 못 했다. 얼굴을 보는 것도 말을 섞는 것도 처음이건만 그런 것에서 오는 어색함마저도 크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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