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6
나는 오늘 어떤 할아버지를 만났다.
97.02.08 남우현 일기 발췌
시간을 넘어서:처녀비행
우현은 예고 없이 고요하게 두 눈을 번쩍 하고 떴다. 머리맡에 창문에서는 부드러운 커튼이 어롱거리며 희미하게 아침 햇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깜빡 깜빡 눈을 연신 감았다 뜨며 멍한 정신을 제 자리로 끌어온다. 점점 산뜻하게 돌아오는 정신과 함께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공기를 잔뜩 머금어 몽글몽글한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로 보이는 전신 거울을 잠깐 보고는 책상위에 있는 달력을 흘끗, 하고 눈여겨본다. 붉은색 색연필로 선연하게 그어놓은 동그라미가 눈에 띈다. 2월중의 8일. 우현의 생일이었다.
우현은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를 벗어나 조금은 쌀쌀한 공기가 감도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미지근한 온기가 약간 남은 바닥을 성큼성큼 걸어 방 문 앞에 고요하게 선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딸깍, 하고 제 방문을 열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얼마 전에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구불구불 웨이브 지며 하늘거렸다. 그런 그녀를 놀래어주겠다는 심산으로 우현은 제가 잡고 있는 문고리를 사알짝 돌려, 소리가 나지 않게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아직 우현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아직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바빠 보였다. 그리고는 살곰살곰 소리가 나지 않게 걸어서 바로 등 뒤에까지 닿으면,
"우현이 일어났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보는 엄마의 모습이 있다.
"또 실패했어!"
실망감과 반가움을 반반 섞어 까르륵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높이 쭈욱 내 민다. 그러면 우현의 어미가 그 두 배만 한 손으로 그 손을 품어 잡으며 보드라운 손바닥에 쪼옥하고 손 키스를 해 준다. 그리고는 '우현이 생일 축하해' 하며 다시 생긋, 하고 웃는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우현의 일상이었다. 올해로 일곱 살 난 우현의 생일. 그리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시작되는 따스한 일상.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날의 시작었음에 우현은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을 조금은 즐기고 있었다.
"우현이 오늘 친구들 얼마나 온다고?"
"다섯 명 온댔어!"
옆집에 현수랑, 2층에 경수랑, 위층에 동우랑... 어쨌든 다섯 명이었어.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수를 세던 우현이 다시 까르르 하고 웃었다. 우현의 웃음소리에 우현의 엄마도 같이 웃으며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 한다..
이것이 그 날의 시작이었다.
-
"생일 축하 합니다"
거실을 가득 메우는 합창소리를 들으며 우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늘을 날 것처럼 붕붕 뜨는 기분을 어찌할 줄 몰라 그저 입이 찢어져라 웃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로, 우현은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상을 한 가운데에 두고 우현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이들이 그 주위를 빼엥 둘러 앉아 있었다. 상 위에 가득 차려진 탕수육이며 닭고기며 하는 음식들은 뒷전에 두고 아이들은 노래 부르기가 더 바빴다. 한 낮에도 창을 모두 막아 놓아 거실은 어두컴컴하게 어둠이 내려 있었다.
사랑하는 우현이!
생일축하 노래가 막바지에 치닫자 부엌에서 우현의 엄마가 촛불이 반짝반짝 거리는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나온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더 커져서 거실을 윙윙 울렸다.
생일 축하 합니다아.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케이크는 커다란 상 한 가운데에, 마련해 둔 빈자리 위로 안전하게 내려앉는다. 우와아아아 하는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울리고 우현은 촛불이 반짝이는 케이크에 한껏 다가간다. 그리고는 가슴 깊이 숨을 모으고는
후욱,
하고 바람을 불었다.
촛불에 희미하게 아른아른 거리던 거실이 까맣게 암전 된다.
예고 없이 다시 환하게 밝아오는 시야에 우현이 두 눈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들어오는 밝은 빛에 놀라 우현은 제 두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연신 눈을 깜빡 거렸다. 서서히 밝은 빛에 적응이 되는 듯, 풍경들이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하얀 벽과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복도 사이사이를 메우듯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바퀴가 달린 침대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짧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우현의 집은 항상 인테리어에 집착이 어린 신경을 쏟는 어머니 덕에 이렇게까지 하얀 곳은 없었다. 하다못해 꽃병이라도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제 어미의 성격이다.
"엄마?"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우현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주변에 있었다면 금세 '그래 우리 우현이~' 하고 돌아올 다정한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없구나. 우현의 작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다. 아니 누군가 있더라도 저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잠깐 혼란 속에 빠지려는 제 생각을 추스르며 우현은 천천히 제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 한 발, 내 딛자 차가운 돌바닥의 기운이 빠르게 올라온다. 호드득 하고 올라오는 소름에 우현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제야 엄습하는 오한을 알아채고는 아래로 내려다 본 우현의 눈에 비치는 것은 가녀리게 파들거리는 전라의 몸이었다.
"맙소사!"
우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쩌렁쩌렁 울리며,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두 중요 부위에 얹는다. 전라에 대한 부끄러움과, 다급함이 섞여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 연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다. 그리고 곧 시선이 닿는 곳은 가까운 간이침대였다. 하얗고 넓은 보가 올려져 있는 간이침대. 우현은 그 하얀 보를 들어 올리고는 넓은 면적을 가늠한다. 그리고는 그 보를 넓게 펼쳐 제 몸에 둘렀다. 만족스럽진 않아도 몸은 가릴 수 있어 부끄러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현의 속을 지배하던 두려움이 점점 물러나고 조금씩 호기심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현의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나 가질 수 있는 그런 감정. 이곳은 도깨비의 집이라거나 요정이 저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하는 그런, 어린아이라서 할 수 있는 약간의 기대감이 섞인 호기심이었다.
"누..구 없나요?"
우현의 목소리는 청량하게 복도를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은 없다. 우현은 그대로 직진을 하기로 한다. 크기 하나 모양 하나 다를 것 없는 문들이 계속해서 우현을 지나쳐 간다. 반복되는 풍경이 계속되는 복도를 한발 두발 거침이 없이 지나치던 우현이 멈추어선 곳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크기와 문양부터가 다른 문 앞이었다.
다른 곳과 다르지 않게 하얀 벽에 다른 곳과는 다른, 커다랗게 뚫린 문.
우현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 커다란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어쩌면 이곳에 요정의 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을 하며.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스르륵 하고 열렸다.
조금씩 조금씩 환하게 트이는 시야 속에는 햇빛이 환하게 떨어지는 창문 아래 처연하게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얗게 새 버린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 거렸고, 깊게 패인 주름은 노인이 살아온 세월을 말해 주려는 듯 흔들거리는 노인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꿈틀 거리고 있었다.
꼴깍. 하고 마른 침을 넘기며 우현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있었다. 그런 우현의 기척을 눈치 챘는지 책을 읽던 노인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와 우현을 바라본다. 커다란 창문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받으며 노인의 주름이 가득한 양 입술 끝이 사르륵 하고 올라갔다. 우현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것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길을 잃었니?"
드디어 노인의 입이 떨어졌다. 생각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려서, 우현은 조금 울컥 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다. 저 속 깊은 곳을 퍽 하고 치며, 턱 밑까지 차오르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우현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울컥 하고 알 수 없는 그 감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들고 있던 책을 탑, 하는 소리와 함께 덮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들어 올려 검지를 까딱까딱 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라는 걸, 우현이 알아듣고 찬찬히 걸어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이 다시 쌔엣 하고 힘이 없는 미소를 짓는다.
"무섭니?"
이번엔 우현이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휘휘 젓는다.
무서움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감정이었다. 무섭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마음이 가라앉았고, 기쁘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낯이 설었고, 평소와 같다고 하기엔 제 마음이 너무나도 붕 떠 있었다. 코끝이 찡하게 울리면서 마음속에서 무언가 응어리가 지는 것 같은 이 느낌을 우현은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요정의 선물을 받은 아이구나."
노인이 다시 웃는다.
"요정이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반문하는 우현에게 노인은 다시 쌔엣 하고 웃으며 '오늘 생일이지?" 라고 되묻는다. 우현이 곧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노인은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을 무릎 위에 깍지를 끼어 얹었다.
"요정이 네게 주는 생일 선물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우현이 다시 고개를 갸웃 거리자 노인이 그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으로 우현의 자그마한 콧잔등을 톡, 하고 건드렸다.
"너무 걱정 말거라. 모두 다 잘 될 거야."
하고 말하며 노인은 다시 손을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남기고 노인의 입이 꾹 하고 다물렸다. 찰나의 시간처럼 흐른 정적 속에서 아직 들어야 할 것이 있고, 노인이 하고싶은 말이 더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현의 시야가 빠르게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 뒤로 창문이 기괴하게 무너졌으며 곧 바닥이 꿀렁거리며 이상한 모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우현은 깊은 당혹감과 구토 감을 스멀스멀 기어 나오며 제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다 됐단다. 아가."
노인의 평화로운 목소리가 울리며 우현은 곧 깊은 암흑 속으로 내 던져진다.
-
우현은 빠르게 두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흐릿흐릿하게 형태가 잡혀가는 우현의 시야 속에 익숙한 무늬의 벽지가 들어왔다. 아침까지 우현의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와 제 어미의 웃음소리를 머금었던 아이보리색 벽지, 그리고 고급 양털이 무성한 카펫과 그 위에 무겁게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유리탁자까지 우현이 알고 있는 그 곳이 맞았다.
숨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우현은 저 깊숙한 곳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를 돌아 한꺼번에 화악, 내 뱉어 진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다시 익숙한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담요를 되찾은 라이너스처럼 안도할 수 있게 된 우현은 그제야 집 안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한 낮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던 거실에는 벌써 뉘엿뉘엿한 노을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는 벌써 5시가 훌쩍 넘어서 있었으나, 집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지금 시간이라면 제 어미가 분주하게 저녁을 준비할 때였다. 그러고 보니 부엌에 불도 꺼져서 고요하기만 했다. 그래서 우현은 다시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엄마?"
커다란 거실에 우현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안방 문이 기다렸다는 듯 벌컥 하고 열렸다.
그리고
"우현아!"
단발마의 비명처럼 우현의 이름을 외치며 눈물이 범벅이 된 우현의 엄마가 뛰쳐나와 우현을 품 한 가득 끌어안는다. 우현은 제 어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서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우현의 얼굴을 이리 저리 쓰다듬으며 숨이 넘어갈 듯 꺽꺽 거리며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서러워서 우현은 가만히 제 어미의 품에 안긴다.
아직 추운 계절에 맞추어 챙겨 입은 니트의 촉감이 전신에 따갑게 문대졌다. 그제야 우현은 제가 또 전라로 이곳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물에 젖어 축축한 손길과 따갑게 제 몸을 문대는 니트를 버텨내며 우현은 자그맣게 말을 시작한다.
"엄마."
들릴 듯 말듯 자그맣게 울린 우현의 말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어미의 눈이 저의 눈에 마주쳐 온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속눈썹까지 푹 젖어 있었다. 그 물기가 가득한 눈이 마치 가련한 내 새끼, 얼른 말 해 보렴. 이라고 하는 것만 같아 홀린 듯, 입을 달싹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모양만이 알 수없는 모양새를 만들며 움직였다.
어미가 다시 그의 품으로 우현을 한 가득 안는다.
그리고
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 어미의 손이 우현의 뒤통수를 연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현은 아까 노인을 보았을 때처럼 제 속 깊은 곳을 툭 하고 치며 턱 밑까지 차오르는 그 것을 느끼며 어미의 등 뒤로 있는 힘껏 제 팔을 넘겨 안았다.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눈이랑 입으로 터져 나왔다. 엉엉 하고 그 것은 막을 시간, 혹은 기회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펑- 하고 터지듯이 흘러 나왔다. 제 볼을 축축하게 적시는 물기와 집이 떠나가도록 울리는 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우현은 저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지 알지 못했다.
* 물풀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0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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