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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하나

[완규] 이슬이를 부탁해 (2/2)

2012.11.19


오글주의, 시점과 시간적 순서는 여전히 뒤죽박죽

#4
"안녕하세요! "

요란스런 인사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를 말없이 바라본다. 보나마나 들어올 인물은 뻔 했으나 종완은 굳이 입구를 내다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뛰쳐들어오는 것을 기어코 보고야 만다.

"잘 부탁드립니다!"

각도기로 재 볼 것도 없이 90까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 오는 것은 더 볼 것도 없이 성규 하나뿐이었다. 애가 참 신났네 신났어. 하는 것으로 시작해 오늘도 재미 좋겠수? 하는 비난과 야유소리를 종완은 무관심으로 응대한다. 남의 사생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위인들임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런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 한 것이라면 단 하나, 24살짜리의 핏덩이 같은 꼬맹이, 아니 다시 말하면 인피니트 리더 성규, 아니 더 간단히 하자 이슬이. 의 존재일 것이 자명했다.

"이슬이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그들의 그런 관심은 곧바로 성규를 향한 놀림으로 표출이 되고는 한다.

"어쩌나 김종완 이놈은 오늘 컨디션 별론가 봐."

성규의 눈썹이 금방 아래로 추욱 처지고 만다. 그런 반응을 보는 이 인간들은 왓하하 하고 박장대소를 하고 만다. 벌써 몇 번이나 당하는 이 패턴에 성규는 금세 또 발목이 잡혀서는 울상을 짓고 만다. 그게 다 이것들이 재미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 줘 봐도 별 효과가 없었으므로 종완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만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순간이 나쁘지 않은 것은 그 와중에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 그리고 살풋이 미소를 짓는 그 순간이 제법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완은 오늘도 성규의 얼굴을 보면서 소리 없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

똑딱똑딱 돌아가는 시계의 작은바늘이 드디어 한 칸을 훌쩍 건너뛰었다. 종완은 기지개를 켜며 흘끔 시계를 본다. 3시 정각. 그 것도 PM 이 아닌 AM. 깊은 첫 새벽에 접어드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길이 는 곳은 녹음 부스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서 있는 성규의 모습이었다. 평소의 무기력한 이미지대로라면 피곤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야 하건만, 악보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얼굴에는 한줄기의 피곤함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쯤에서 종완은 약간의 격세지감을 느끼고야 마는 것이다. 89년생의 이제 겨우 24살 먹은 저 꼬맹이와 80년생의 33살 먹은 자신의 나이 차이에 대해서. 고작해야 9년의 차이건만 기지개를 켜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어깨의 뻐근함은 역시나 9년의 차이 덕분일 것이다.

당연하지만 녹음실에 남은 것은 저 24살짜리 꼬맹이 성규와 33살의 아저씨인 자신, 종완뿐이었다. 종완은 곧 턱을 괴고 부스 속의 성규를 무심히 바라본다. 염색을 해서 색소가 옅은 머리통이 흥얼거리는 노래 박자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흥얼거리는 노래는 아마도 저가 줘서 더 신이 나서 불렀던 그 노래였다.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아 달라던 그 노래. 종완은 문득 먼 미래에서 추억할 오늘을 떠올려 본다. 희미한 흑백의 기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채롭게 반짝이는 빛나는 과거가 될 것인가. 결국엔 그 것 또한 쓸모없는 생각이어서 종완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 젓는다. 잡념을 쫓아내는 것이다. 성규는 부스 안에서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저는 부스 밖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는다. 시간은 새벽. 적막과 함께 흐르는 나직한 노랫소리가 꽤나 잘 어울린다고 종완은 생각했다.

"이제 그만 할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 작은 머리통이 올라와 종완을 본다. 표정은 보나마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종완은 말없이 검지를 들어 시계를 가리킨다. 그 새에 분침은 부지런히 움직여 숫자 10에 가 있었다. 성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건 보나마나 언제 시간이 이렇게 갔냐는 뜻이다. 종완은 풋- 하고 웃고 만다. 아직도 피곤함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었다.

"이제 나와."

다시 말을 붙이니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은 이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늦은 오후에 하루를 시작하면 새벽 서너 시는 돼야 녹음의 마감과 함께 하루도 끝이 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끝은 언제나 성규와 함께였다. 노래 한곡으로 시간을 얼마나 써먹는 거냐는 비난 아닌 비난들은 애저녁에 쑥 들어가 버렸다. 별 수 있겠는가, 당사자가 계속 다시 부르겠다는데. 게다가 덕분에 둘만의 시간이 늘어난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종완이 거기에 대해 이렇다 할 사족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성규의 주장은 더욱 순조로웠던 것이다.

종완이 의자등받이에 깊이 제 몸을 묻었다. 의자는 삐걱 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는 성규가 나올 녹음부스 문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 모양새로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인가. 하는 것은 종완에게 있어 자그마한 유흥거리였다. 처음에는 쭈뼛 거리는 몸을 주체 못해 삐걱거리는 모양새로 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요 며칠 사이에는 꽤나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게 됐다. 그럼에도 아직 그 것이 종완의 유흥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는 성규의 눈이 미묘하게 종완을 빗겼다. 종완은 소리 없이 숨죽여 웃고 만다. 다른 데서는 잘도 눈을 마주치더니 유난히 이 시간 이때에 성규는 종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처음에야 내외하는 건가? 하는 마음이었지만 이 쯤 되니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게 오늘도 어김이 없어서 종완은 그저 피식 하고 웃고 마는 것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비장한 표정으로,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한 채 말한다.

"형"
"왜?"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의아한 표정의 종완을 성규는 똑바로 바라본다.

"하고싶은게 있는데"
"무슨?"
"움직이지 말아줘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꽤나 진지한 얼굴 표정 탓에 종완은 의자에 앉아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성규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삼키듯 크게 움직였다. 성규의 발이 천천히 한발두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발길은 명백하게 종완을 향하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오는 성규를 종완은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오늘이 무슨 기념일이라도 되는가 하는 그런 답지 않은 고민까지 하던 찰나에 성규는 벌써 종완의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는 사뿐히, 종완의 무릎위에 다소곳하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것이다. 긴장한 데다 힘까지 잔뜩 들어간 모양인지 몸의 무게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탓에 종완은 더 능청스레 그 허리를 제 팔로 꼭 붙들어 앉혔다. 움찔, 하고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곧 그 작은 얼굴이 종완의 귓가를 향하고 있었다.

언젠가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 함께가 아니더라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지금 이 순간을 꼭 기억해줘

나직한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그 가사는 저도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이어서 종완은 잠깐 흐흥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맹랑한 것 같으니라고. 성규의 허리를 잡은 종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잔뜩 붉어졌을 그 얼굴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는 목덜미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기분이 꽤 유쾌했다.

"바라는 대로..."

그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5
"이슬아"

종완의 입을 타고 나오는 단어의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이슬이. 언제부터 이슬이었던가, 왜 이슬이가 됐던가 하는 기억들이 소용돌이 쳤다. 성규의 눈이 가만히 종완을 향했다. 잔잔하지만 또 어딘지 흔들거리는 눈동자를 종완은 들여다본다. 말이 없이 정적만이 공간을 맴돈다.

"이슬아."

성규의 눈은 여전히 종완을 향하고 있다. 약간의 비장함을 담아 정수리에 턱을 괸다. 보송하게 잘 마른 머리칼이 턱 밑에서 바스락 거렸다.

"왜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이슬이다."
"그게 뭐에요"
"이슬이 너 좋다고"

성규의 몸이 굳었다. 참지 못하고 올라오려는 고개를 턱으로 괴어 올라오지 못하게 눌렀다. 그러자 두 손으로 팔꿈치께를 꾸욱 하고 잡는 것이 느껴졌다. 흐흥 거리는 콧소리가 나온다. 보나마나 눈썹이 또 축 늘어졌을 게 뻔했다. 그 것도 못내 사랑스럽다. 성규의 손이 다시 종완의 허리를 감았다.

"형"

목소리가 떨렸다.

"나 자고가도 돼요?"
"아니 숙소 들어가."

그 것은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르는 사고에 대한 예방이었다.

#6
이슬이 부를까?

핸드폰을 들고 물어보는 놈을 본다. 물어보긴 물어보는데 손은 이미 번호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 걸 보니 말려도 말을 듣지 않겠다 싶어 종완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이슬이가 보고 싶은 마음도 1g정도 담긴 반응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최근의 술자리에는 이슬이, 그러니까 성규가 거의 필수적으로 참석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 것의 원인은 대부분 종완 자신에 있노라고 말은 익히 들었지만, 그래도 그다지 실감은 나질 않아서 그저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 것을 두고 '네놈은 섹스나 할 줄 알았지 연애는 글러먹은 놈이구나!' '네 머릿속에는 섹스만 들어가 있는 게지' 하는 따위의 비난을 익히 들었으나 그 것도 그다지 큰 영향은 주질 못해서 최근에는 그저 미적지근하게 성규를 보고 술을 마시고 들여보내고 하는 것이 쭈욱 이어지고 있었다.

어, 이슬이냐? 어디야? 스케줄은 끝났고? 올래? 응?? 어 있지.

전화하는 놈의 눈길이 잠깐 종완을 향했다가 다시 허공을 향한다. 잠깐 동안 마주친 눈빛에서 '넌 인마 범죄자...' 하는 의미가 약간 비쳐 보였으나 종완은 앞에 놓인 자그마한 소주잔을 말없이 비울 뿐이다. 전화통화는 벌써 막바지에 달하는지 술집의 위치를 요란스레 전하고 있었다. 어, 그래. 있다 보자. 말을 끝으로 빙글거리기 시작하는 놈의 얼굴 표정이 적나라했다.

"금방 올 것 같다."

말을 전하는 놈의 표정이 빙글빙글 거리기 시작했다. 저 것은 필시 되도 않는 계략을 꾸밀 때의 표정이 틀림이 없어서 종완은 무심코 비웃음을 흘리고 만다. 계략이라고 해 봤자 이슬이 눈썹 축 처지는걸 보는 게 다일게 뻔해서 종완은 벌써부터 조금은 기대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뻔 하게 보는 그걸 보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지만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그 리액션은 그래도 언제나 신선하게 보이고 만다. 그걸 두고 '콩깍지가 제대로 끼인 게지' 하는 말이 참으로 꼭 들어맞는 상황이라는 것에 종완은 긍정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이슬이'가 이곳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가장 조용한 것은 종완 자신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내외라도 하는 건가 하는 반응은 꼭 따라오는 것이었지만 그 것은 또 그것대로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슬이 왔네?"
"이슬이 오늘따라 눈이 더 작네?"
"이슬이 눈 뜨긴 뜨니?"

성규가 모습을 나타낼 때면 저보다 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놈들이 있었다. 그러니 종완은 그 뒤로 밀려 그저 억울하게 처지는 눈썹이나 바라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슬이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시작하자"

벌써 준비를 해 둔건지 성규의 앞에는 벌써부터 소주잔 하나가 들어간 맥주잔이 털썩 하고 올라온다. 그러면 성규는 억울한 눈썹을 하고 그 폭탄주를 쭈욱 하고 한 번에 들이킨다. 그걸 다 마시고 나서야 성규의 앞에는 맑은 참이슬 소주가 앙증맞은 잔에 담겨 내어올 수가 있었다. 그러면 성규는 연이어 한잔의 소주마저 입 안으로 탈탈 털어놓고 나서야 깊은 숨을 푸욱 하고 내 쉴 수 있었다. 그러면 놈들은 또다시 떠들썩거리며 '우리 이슬이는 참이슬도 참 잘 마시네!!' 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보통은 이쯤에서 적절하게 멈추고 흔히 말하는 '이슬이 몰이'를 시작하건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이슬이 앞에는 다시 소주로 가득 찬 꼬마술잔이 놓인다. 한잔 두잔 세잔 까지 마시고 성규는 의심스러운 듯 주위를 휙휙 훑는다.

"저 이,거 마시,면 갈 거 같,은데,요"

그 말은 말 그대로 그 한잔으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더 신이난 놈들은 그저 '김종완이가 알아서 다 책임 쳐 줄 거야' 라는 말을 덧붙일 뿐이다. 성규의 눈썹이 괴롭게 꿈틀 거리더니 쭈욱- 잔을 단번에 들이킨다. 그러고 나서는 그야말로 봉인해제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에 얼굴은 헤벌쭉 하고 웃으며 종완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면 놈들은 하나 둘씩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오늘 은서가 일찍 들어 오랬었지"
"오늘 집안일이 있었네?"
"일찍 들어가 봐야겠네."

단언하건데 순수하고 착한 아동 은서는 밤 열한시까지 깨어 있을 리가 만무하고 나이 서른이 넘은 이 남자들이 아직도 독립을 안 하고 있을 리 만무하므로 저 말들은 모두 거짓부렁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종완은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성규 때문이었다.

"형."

하고 성규가 불렀다. 고 하는 것은 어딘지 낯이 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어쨌든 현실은 그랬다.

"왜?"

하고 종완이 대답했다. 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현실이 그랬다.

"저.. 형 봤어요. 펜타포트..이천칠 년.."

이왕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문장을 제대로 만들어서 말을 하면 좋을 텐데 싶지만 알콜에 정신을 맡긴 성규에게는 그 것이 힘든 일인 듯 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의 단어들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2007년의 전설적인 펜타포트 락페스티벌.

"저 그때 형 보고 저도 '시발 술 사줘.'라고 하고 싶었는데 미성년자라.."

콜록콜록. 하고 종완은 마시던 술을 다 뱉어내었다. 사래가 들린 거다. 당황스러움이라는 말은 이럴 때 붙이면 딱 알맞은 소리지 싶었다. 그걸 빤히 보던 성규가 배시시 하고 웃었다.

"오늘 술은 형이 사주세요. 헿"

별 수 없었다. 종완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밖에.

#7
종완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찾아온 성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사가 다 됐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뛰어 들어온 모양새가 꽤나 봐줄만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것이다. 후다닥 달려오자마자 성규는 가사를 보여 달라며 떼 아닌 떼를 쓰는 통에 가사노트를 통째로 내주었더랬다. 가사를 받기 무섭게 성규의 입은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기만 했다. 몇 분이 지나도 성규의 눈이 가사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탓에 지루해지는 것은 종완이었다.

"언제까지 읽기만 할래?"
"가사가 너무 좋아서..."

성규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너무 좋아요. 하고 다시 말하는 목소리에서는 종완마저도 살짝 감정이 흔들렸더랬다. 이럴 때면 종완은 저를 비난하는 놈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이슬이를 꼬신 게 아니라 이슬이가 날 꾄 거다!' 라고. 자신만 도둑놈이라고 비난 받는 것은 불공평 했다.

이러나저러나 아직도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는 성규를 두고 종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특하게도 마실 거라도 하나 주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것은 종완치고 매우 친절하고도 순조로운 사고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종완은 몇 가지의 분말차들을 앞에 두고 고민을 했다. 물론 티백들도 몇 가지인가 있었으나 어쨌든 그 것은 종완의 고민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커다란 (테디베어가 몇 개인가 귀엽게 들어간 커다란)머그컵을 들고 종완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커피 분말만 들어 있다고 쓰여 있는 인스턴트커피 스틱과 단맛이 정말 강할 것 같은 핫초코 분말 통을 들고 고민을 하는 것뿐이었다. 어느 쪽이 더 취향일 것인가. 종완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술 취향이라면 소주 보다는 맥주가 더 맞고 음료수라면 탄산 보다는 이온음료 쪽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쓴 커피? 아니면 단 핫초코? 세계 10대 난제라도 상대하는 것처럼 종완의 머리에서는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국 종완이 집어든 것은 핫초코 분말 통이었다. 커다란 머그컵에 핫초코 분말을 큰 수저로 빠르게 서너 번 푹푹 퍼서 넣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공중으로 피어오르는 가루들을 빤히 보다가 아까 전부터 이미 다 끌어 김이 삐익 올라오는 전기포트를 집어 들었다. 뜨거운 물을 푸짐하게 부어 넣으며 핫초코 가루마냥 갈색 빛이 도는 물이 가득 오르는 것을 종완은 만족스럽게 내려다 봤다. 그 갈색 물을 티스푼으로 휘휘 내 저으며 종완은 빨갛게 염색 된 뒤통수를 보며 잠깐 웃었다. 단순히 쓴 것 보다는 단것이 좋겠거니 싶었다.

"자"
"뭐에요?"
"핫초코"

성규의 의심스런 눈이 머그컵에 머물렀다. 딱히 못 마실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딘지 의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종완은 그저 (매우 고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머그컵을 쭈욱 내밀 뿐이다. 성규는 약간의 지체 끝에 그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뜨거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그리고는 한 모금. 핫초코를 들이켰다. 달았다. 정말로, 진짜로 달았다.

"잘 마실게요."

성규는 말하며 머그컵을 제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종완을 보며 씨익 하고 웃는다. 종완은 만족스러운지 제 몫의 잔을 들고 성규의 옆에 풀썩 주저앉는다. 그 사이에 성규는 아무도 모르게 살그머니 머그컵을 조금 멀리 쭈욱 밀어 내었다. 머그컵 속에는 정말로 단맛밖에 나지 않는 핫초코가 한강수마냥 가득 담겨 있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저 핫초코를 어느 세월에 다 마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결론은 간단했다.

안...마시면 되지!

기껏 타다 준 종완에게는 조금 미안한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저 한강수마냥 넘치는 핫초코를 다 마실 수는 없었다. 뭘 마시겠냐고 물어봐 줬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성규는 애써 머그컵에서 시선을 거두어 내었다.

"핫초코 안 좋아해?"
"아뇨 식히는 중이에요"

조금 멀리 내 밀어진 머그컵을 보며 묻는 종완에게 성규는 더없이 무심하게 대답을 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핫초코에게는 차갑게 식어버린 미래만 기다리고 있었다.

#8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몇 가지인가 있었다. 책을 읽거나, 멍을 때리거나, 인터넷 기사를 읽거나, 노래를 듣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것들. 많은 방법들 중에서 왜 굳이 TV 전원을 켜는 것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은 종완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책을 읽기에는 방이 너무 어두웠고, 멍을 때리기는 싫었고, 인터넷 기사를 읽자니 컴퓨터가 너무 멀리 있었고, 노래를 듣자니 오디오가 손에 닿지 않았고, 술을 마시자니 냉장고에 있는 술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선택한 TV에서는 무엇이 나오고 있었는고? 하니,

제가 그래서 대표님께!! ....해서!! ... 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성규였다. 염색을 해서 색소가 옅은 머리칼이나, 가늘게 내 뻗은 두 눈이나, 곤란할 때마다 버릇처럼 나오는 리액션이나, 모두가 성규였다. 요즘 들어 열심히 예능을 뛴다더니 사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이런 황금 예능 시간에 티비에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종완은 옆에서 뒹굴던 쿠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말을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마음과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운 마음이 반반을 차지했다.

TV속의 성규는 말 그대로 아이돌의 모습이었다. 클로즈업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바뀌는 표정이라거나, 호선을 그리는 작은 입이라거나 곤란하게 축 처지는 눈썹이 적나라하게 TV화면에 선명히 들어왔다. 간간히 카메라를 보고 웃는 게 마치 저를 보고 웃는 것 같아서 몇 번인가 당혹스러움에 움찔거리고 말았다. 단체 토크 예능인데도 카메라에 비치는 횟수가 많았다. 그리고는 문득 시계를 올려다본다. 이제 곧 12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TV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성규의 모습이 크게 들어왔다. 웃는 모습. 난처하게, 두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종완이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핸드폰 액정을 켜고 연락처를 실행시켰다. 그리고 찾는 번호는 '이슬이' 정갈하게 각이 진 글체의 그 것을 빤히 보다가 종완은 통화 버튼을 꾹 하고 눌렀다.

어디야? 집인데.. 올래? 할 말이 있어.










리빙포인트!! 고백은 완자가 했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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