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관은 조선과 현대가 뒤 섞인 패러렐월드
원작은 샤바케
성규는 본디 몸이 약했다. 갓 태어났을 적에 한줌도 되지 않는 그 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까 만지지도 못하고 가만히 가슴위에 살짝 얹어놓고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는 제 어미의 말로 미루어보아 그 것은 태생부터 이고 감수해야 되는 성질머리인 듯 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성규는 자라는 내내 수도 없이 많은 병치레를 겪어야 했다. 태어난 지 반년이 조금 안돼서는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체온과 끝을 모르고 울컥울컥 쏟아내는 토악질 때문에 응급실에 가야했고, 세살이 되던 해에는 급성폐렴 때문에 황천길 입구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왔더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규의 병치레는 그 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커다란 병을 앓는 일은 없었으나, 그 급성폐렴이 문제였는지 자잘한 기관지염을 달고 살아야 했다. 찬바람을 조금 맞았다 싶으면 얼굴이 파리해졌고 조금 부산하게 움직인다 싶으면 금세 득달같이 기침이 따라붙었다. 덕분에 성규는 종가집의 맏이면서도 막내인 것처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하며 자라게 된 거였다. 물론 다른 형제가 없는 것도 한몫 했겠지만, 성규에게 몰리는 애정 어린 손길들은 조금 과한 것이긴 했다. 조금이라도 숨을 몰아쉬면 벌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제 몸을 이부자리에 눕히려고 하는 어른들을 보며 성규는 한숨을 배웠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성규가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집안일을 돕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용인 들 뿐이었으니 당연히 날로 늘어가는 것은 역시 한숨이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 저 밖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 평소엔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물렁하던 어른들이 금세 얼굴색을 바꾸며 말했다. '성규야 우리 아가 성규, 성규가 밖에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할아비 (또는 할미, 또는 애비)는 이 세상을 살아갈 낙을 잃고 말거란다. 아가, 우리 아가 성규야.' 라고 말하는 통에 역시 마음이 약한 성규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하루 한 시간이 멀다하고 저에게 배달되는 몸에 좋다는 탕약들과 보조제들 속에서 성규는 조금 회의했다. 왜 내 몸은 이렇게도 약해서 친구하나 제대로 사귈 수 없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 탓이었다. 그런 성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성규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는 드디어 '그 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오늘부터 성규 너와 함께 지낼 놈들이다."
평소와 다르게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것은 파란색이 고르게 퍼져 예쁜 옥구슬 하나와 허우대가 멀쩡한 남자아이였다. 성규는 그 옥구슬과 남자아이를 빠안히 바라보았다. 놈'들' 이라고 했는데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옥구슬 하나와 남자아이 한명이 다였다. '들' 이면 다른 애가 또 있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갸우뚱 하고 고개를 기울이던 차에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하고 웃는 얼굴이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난 얘 맘에 들어."
남자아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톤이 조금 높았다. 평생 실내에서만 지내 얼굴이 허연 성규와는 달리 생기가 도는 얼굴로 아이는 낮게 키득거렸다. 영문을 모르고 멍청하게 바라보는 성규의 눈에 곧 만족한 듯 얼굴 표정을 푸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는 옥구슬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상놈은 몰라도 나는 얘 맘에 들어. 좋네, 저 성규란 놈이 죽을 때까지 옆에 붙어있어 주지."
"바라던 바로구먼"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는 성규에게 할아버지는 그저 허허 하고 웃어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남기는 말은 '성규 네 말동무를 삼아 데려온 놈들이니 요긴하게 잘 써먹어라' 하는 말 뿐이었다. 성규의 눈은 다시 파란 옥구슬에 가 머물렀다. 아이의 정체가 단순한 말동무라기에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더 의심스러운 것은 이 파란 옥구슬이었다. 놈'들' 이 신경 쓰였고 아이의 '상놈' 이라는 말이 절로 마음에 걸렸다.
"이 옥구슬은요?"
"이 잠 밖에 모르는 놈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아가, 내 이름은 명수다 명수, 얼른 불러다오"
아이는 벌써 성규의 바로 앞에 와 빙긋 하고 웃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은 여덟 살짜리 성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갑작스러움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 깜빡 거리는 성규를 내려다보며 본인을 명수라 칭한 아이는 '얼르은!' 하며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며...명수우..'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 거리니 빠르게 '그래그래 말도 자알 듣지' 하며 아이는 성규의 머리를 흰 손으로 슥슥 쓰다듬어 내렸다. 꼭 제 어미에게 칭찬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돼서 묘하게 아직 장지문을 열고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서있는 할아버지에게 눈을 돌리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도토리묵 한상 봐라 할 테니 문 앞에 두고 자거라"
짧게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서는 할아버지의 등에 대고 명수는 "누구 좋으라고!" 하는 소리를 내었으나 그 것은 부질없이 묻히고 말았다. 그거에 기분이 조금 상한 듯 명수는 콧김을 킁 하고 내 쉬다가 곧 성규를 보며 에헤헤 하고 웃어버리고 말아서 성규도 같이 에헤헤 하고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것이 성규와 명수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옥구슬의 정체는 그 뒤로도 한참 뒤,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던 새벽녘에서야 알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푸짐하게 도토리묵을 차려놓은 상과 함께 성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실 도토리묵 말고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잠자리였다. 그러나 곧 성규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이 나타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저 꿈속에 누군가의 외침인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선명해 지더니 꿈속의 소리가 아니라 꿈밖의 소리가 돼 있었다. 뒤척뒤척 거리는 귓가에 끈질기게 붙는 소리.
ㅅ..방.....ㄱ..ㅅ..방......김..ㅅ..방.....김서방...김서방!!
제 귓구멍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마냥 소리가 선명해 졌을 때, 비로소 성규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것은 남자아이였다. 이상하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시감에 성규는 눈을 껌뻑껌뻑 거렸다.
"누구..."
"도토리묵 잘 먹었어 김 서방!"
성규의 눈이 멍청하게 껌뻑껌뻑 거렸다. 성규를 바라보는 남자아이는 묘하게 들떠 보였다.
"진짜 이렇게 맛있는 묵은 처음이야!! 김 서방 좋은 김 서방이구나!"
묵이라는 소리에 성규는 남자아이의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옥구슬!! 이부자리에서 성규는 벌떡 하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도토리묵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열심히 우걱우걱 거리는 옥구슬을 빤히 바라보았다. 생김새는 명수의 또래처럼 보였으나 하는 짓은 명수와 많이 달라보여서 그게 또 신기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조심스레 묻는 성규의 말에 묵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추고 옥구슬은 성규를 바라보았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김 서방 좋은 김 서방이니까 알려줄게! 나 성열이야 성열이!"
성열은 다시 도토리묵을 열심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명수가 500년 묵은 범이라는 것과 성열이 100년 묵은 도깨비라는 사실을 성규는 15살이 돼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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