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의 기억은 산 속 낙엽더미부터 시작한다. 다람쥐는 성난 표정의 제 어미를 바로 보지 못했다. 씩씩 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다람쥐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화가 난 것이다. 자그마한 앞발에는 기다란 나뭇가지가 꾹 하고 붙들려 있었다. 다람쥐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손안 가득 그러 쥔 사탕 꾸러미를 앞에 내 놓는다. 어미는 손안의 나뭇가지를 꾹 하고 힘을 주어 잡는다. 그 이유를 다람쥐는 잘 알고 있었다.
"잘못 했어요."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므로 목소리는 최대한 시무룩해야 했다. 물기도 섞이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다람쥐의 목소리는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건조하기만 했다. 어미의 눈이 크게 꿈질 거렸다. 쥐어짜낸 눈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다람쥐는 제 어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하고 조아렸다. 다람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성의 기미였다. 체념한 듯 푹 하고 내 쉬는 어미의 한 숨소리와 나뭇가지가 낙엽더미를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람쥐는 쾌재를 부른다. 그 것은 곧 잔소리만 잘 넘기면 된다는 뜻이었으므로 다람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고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 시야에는 벌써 발치 앞으로 다가온 어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에 어미는 다람쥐의 귀를 센 힘으로 잡아끌었다. 다람쥐는 '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가 그런 짓 다시는 하지 말랬지!!"
화를 삭이지 못한 잔소리와 격통이 파도처럼 다람쥐의 귀에 파도처럼 덮쳐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람쥐는 악악 소리를 지르며 저를 끌고 가는 어미를 따라 맥없이 끌려가고 만다.
그리고 기억은 다시 수풀 속을 바시락 거리며 질주하는 것으로 뛰어 넘는다. 다람쥐는 이를 앙다물고 수풀 사이사이를 헤치며 달렸다. 뒤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자꾸만 저를 뒤 쫓아 오는 듯 한 가쁜 기분에 발은 자꾸만 흙바닥에 엉겨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자그마한 주둥이로는 거친 숨이 몰아 나왔다. 그리고는 벌컥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포효 소리에 다람쥐는 우뚝 멈추어 선다. 곧이어 바람을 타고 흘러 모이는 탄내를 다람쥐는 느낄 수 있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로 방금 전까지 저가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찾아보려고 하지 않아도 화르륵 하고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기둥이 보였다. 다람쥐의 눈에는 글썽하고 눈물이 고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다람쥐는 수풀사이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요란 : 도깨비와 덫과 도토리
한가로운 한 낮의 오후였다. 밝은 빛이 장지문에 가로 막혀 창호지는 허옇게 빛이 났고, 휑하고 부는 바람은 창문을 조금 건드리고 지나쳐 갔다. 그리고 성규는 뜨신 방바닥을 깔고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는 중이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간 소설이었으므로, 한참 전부터 정신이 팔려 돌아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깥 복도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소란은 필히 놀기 좋아하는 도깨비의 짓거리일 것임에 성규의 뒤에서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명수였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발끝이나 가끔 까딱 거리며 무료하게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저를 앞에 두고 이리도 무관심 한 것은 못마땅하였다. 그리하여 명수는 시답잖은 화재로 종종 성규에게 말로써 훼방을 놓아 성규에게 욕을 벌어먹었다. 그러니까 예컨대 이번에도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먼저 명수는 지인한 하품을 쩌억 하고 내 뱉었다. 그리고 동그란 뒤통수에 대고
"약은 먹었느냐?"
"약은 아플 때나 먹는 거지. 난 멀쩡한데 약을 왜 먹어?"
"아까 기침을 했잖느냐"
"그건 아파서 한 것도 아니고, 기침도 아니었어!"
"기침을 하였는데 아픈 게 아니라니"
"재채기야 재채기! 코가 간지러워서 나오는 재채기!"
이즈음에서 성규는 명수를 향해 돌아앉았다. 묘하게 말이 통하지 않는 듯 한 갑갑함 때문이리라. 그 사이에 명수는 벌써 성규의 코앞 까지 와서 두 손으로 얼굴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표정이 꽤나 진지하다.
"코에 뭐가 있다고?"
"없어! 없다고! 이 것 좀 그만 놔"
신경질 적으로 두 손을 휘휘 내 젓는 성규 때문에 명수의 손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사실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 하였으므로 자진해서 떨어졌음이 분명 했다. 책 좀 읽게 가만히 있으면 안 돼? 하고 따지듯 물어보는 말에도 돌아오는 건 '나는 널 걱정하는 거다' 하는 뻔뻔한 대답이라 금세 한 숨을 푹 하고 내 쉬는 건 성규의 몫이다. 결국 둘의 투닥거림이 멈추는 것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최씨의 헛기침 소리 덕뿐이다.
"무슨 일이세요?"
바깥의 눈치를 살피듯 되물어보는 성규의 말에 미서기문은 금세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뒤로 서 있던 최씨가 고개를 꾸벅이며 한 걸음 물러선다. 빈자리에는 그 덩치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인물이 서 있었다. 성규 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듯 한 그는 가여울 정도로 바짝 마른 몸이었다. 그를 두고 성규의 눈이 의문을 품자 '새로 온 아이입니다' 라는 답이 돌아온다. 최씨가 조용히 등을 떠밀자 그는 힘없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와 멀뚱히 섰다.
"인사 드려야지"
"아니, 괜찮아요."
속삭이듯 나직이 내 뱉은 최씨의 말을 성규가 가로 막았다. 그러자 대번 '큰 어른께서 이 방 수발을 들게 하라셨습니다.' 하는 말이 돌아온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확신 없이 말끝을 늘이며 성규의 표정은 대번 난처해진다. 딱히 밖으로 다니는 일이 없는 성규에게는 그러한 이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봐줄리 없는 최씨는 그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난처하게 그를 보는 성규의 뒤에서 명수는 난데없이 푸흣 하는 웃음을 내 놓는다. 돌아선 성규의 눈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뭐야 갑자기?"
"뭐 당장 지금이 아니래도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무책임 하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성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필요하면 어련히 부를 테니 집안일이나 잘 가르쳐 놓지?' 하며 귀찮음을 가득담은 손짓으로 휘휘 내 젖는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성규는 미간을 좁힌 채로 최씨에게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할 일을 마친 최씨는 '성종이라 부르면 됩니다.' 하는 말을 남기고 성종이라는 그와 방을 나섰다.
"몸이 날랜 놈은 쓸모가 많아"
"무슨 뜻이야?"
"그 말 그대로지"
'나무까지 탈줄 아는 놈이면 더 그렇지.' 가볍게 어개를 으쓱이며 조용히 단서를 흘리는 명수의 목소리를 성규는 흘려들었다.
*
다람쥐가 다다르는 곳은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이 빼곡히 들어찬 민가였다. 쉴 새 없이 자신의 일들을 하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인간들 사이에서 다람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숲에서 살 때처럼 사람으로 둔갑하여 보아도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을 한 다람쥐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간혹 일거리를 나누어 주는 이가 있기는 했으나 결국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이 쫓겨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다람쥐가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도둑질이다. 들키지 않게 노점상에서 과일을 훔치기도 했고 때로는 떡 한 덩이를 또는 찐빵 한 덩이씩을 훔쳐 달아났다.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둔갑을 하기도 했고 들키지 않기 위해 다람쥐가 돼 쥐구멍에 숨어들기도 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 질 무렵 아마도 죽을 때 까지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람쥐는 문득 떠올렸다.
숲으로 돌아갈까.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을 머릿속 깊은 곳으로 집어넣었다. 이제 돌아간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개를 설레설레 털어내고는 제 손안의 떡을 먹어 치운다.
*
"김서방"
성열의 애처로운 부름이 성규의 귀를 자꾸만 잡아끌었다. 아까 전부터 자꾸만 저를 불러대는걸 무시하고 앉았더니 이번엔 그 방법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소리를 끊고 여전히 책에 몰두할 뿐이었다. 성열이 한숨을 푹 하고 내 쉬었다. 팔이 아프단 말이오오...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말을 꿀꺽 하고 속으로 넘긴다.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인간의 체벌을 받는 것이 도깨비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팔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도토리묵에 대해서만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성규 탓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도토리묵 구경도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럼 집을 나가면 될게 아닌가 싶지만 서두 요즘 세상이란 게 도깨비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란 여간 퍽퍽한 게 아니었다. 그런 요즘 세상에도 등 따시게 자고 먹고 종종 도토리묵도 얻어먹을 수 있는 이 집은 낙원이었다. 가끔.. 이 아니라 꽤 자주 벌어지는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김서방!"
이번엔 성열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 것은 방금 전 성종이 두고 간 도토리묵이 성규의 책상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것 보다 훨씬 더 성가신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건지 책에 눈을 떼지 않던 성규가 급작스레 프흡- 하는 폭소를 내었다. 성열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진다. 점점 진해지는 짐승의 냄새에 이어 이번엔 복도 밖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 탓이었다. 김서바앙! 다급한 성열의 목소리가 무색하게 성규의 방문은 드르륵 하고 너무나도 경쾌하고 열리고 말았다.
"뭐야 이건?"
열린 문으로 들어선 명수가 성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씨익 하고 미소를 띠운다.
"이 집이 도깨비 팔을 빌어야 될 정도로 공사가 부실했던가?"
"그런 건설적인 이유면 차라리 좋지"
저를 놀리듯 이어지는 대화에 성열은 흥 하는 콧바람을 내었다. 저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한 처사라는 의도를 제 딴에 내 비치는 거다. 명수는 그걸 흘끔 보다가 냉큼 성규의 책상 앞으로 다가 앉았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가탈을 놓았기에?"
성규의 눈이 드디어 책에서 떨어졌다.
"집 뒤에 쌓아 놓은 한 달 치 장작을 와르르 무너뜨렸지."
요즘의 난방은 장작으로 할 필요가 없었으나 성규의 약욕 물은 장작을 태워 데운 물을 썼으므로 한 달 치의 장작은 그 양이 꽤 되었다. 그걸 사람 힘으로 차곡차곡 모양 좋게 쌓아 놓은걸 저 힘자랑 하다가 잘못하여 무너뜨렸으니 죄라면 그 정성을 도로 아미타불로 만든 죄렷다. 무너진 장작은 인부들이 다시 차곡차곡 쌓아 놓았으나, 그런 일에 다시 시간을 쓰게 만든 것이 송구스러워 성열에게 제를 가한 것이 성규였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게 저 때문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성규의 얼굴엔 곧 난색이 떠오른다. 명수는 혀를 쯧쯧 하고 차 올렸다.
"누가 보면 네가 그런 줄 알겠구나."
미간에 주름을 죽죽 밀어내는 명수의 손길이 제법 다정해 성규는 힘이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어디 다녀와?"
"아, 산책을 좀 했지. 근데 조금 재미있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잖은가."
"무슨?"
명수의 말에 반문을 하며 성열에게 이제 그만 팔을 내려도 좋다는 수신호를 보내니, 금방 왁! 하는 소리를 내며 성규의 책상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런 성열을 조금 한심하단 표정으로 보던 명수는 다시 시선을 성규에게 바로 잡았다.
"집안에 좀도둑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안 돼!"
온 몸으로 부정을 하듯 뒤로 나 앉는 성규를 두고 명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믿지 않을 거면 말던가 하는 속이 편해 보이는 응대였다. 그러나 그 제기자가 명수라는 점에서는 조금 깊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는 일이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얘기를 괜히 끄집어내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도깨비랑 범이 있는데?"
"너무나 좀스러운 것이거나, 내 눈을 속일 정도로 대단한 도둑놈인 게지"
"어느 쪽?"
"얘기만 들어보면 좀스럽기 그지없다."
"물건들은?"
성규의 물음에 명수의 대답으로 나오는 것들은 정말로 너무나 좀스럽기 그지없었다. 다과상에 올리려고 깎아둔 사과조각, 주전부리삼아 올리려던 떡, 약과, 사탕 같은 것들이 고작이었다. 커 봤자 사과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던가 하는 것뿐이다. '우리 집에 귀한 게 그렇게 없어?' 하는 성규의 말에 명수는 가벼이 웃었다.
"그 관리라는 걸 내가 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택도 없는 게지"
"잠깐만!"
다급하게 성열이 외쳤다. 나머지 두 사람의 눈이 성열에게 향한 것은 당연하다.
"내 묵!"
"뭐?"
"내 묵 도둑이야!"
명수와 성규가 서로를 마주보며 두 눈을 깜빡깜빡 거리고 있을 때, 성열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 쳤다.
"아이 참 그 놈이 내 묵을 훔쳐 갔대도!!"
답답하다는 듯 내 지르는 성열의 말에 이번엔 성규의 입이 멍청하게 떡 하고 벌어지고 만다.
시간은 성열이 장작을 뒤엎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성열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뒷마당에 등장한다. 나무장작은 아직 정갈한 모양새로 잘 쌓여 있었고 그 장작더미는 성열의 관심의 한쪽 귀퉁이에도 들지 못했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모양새로 성열이 향하는 곳은 마당 한 쪽 구석 선선하게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묻어 둔 자그마한 독이었다. 그 위에 덮어 놓은 자갈들을 헤치고 작은 독 뚜껑을 열면 그동안 반조각 씩 모아둔 도토리묵이 그 모양새를 드러낸다. 때 되면 넘칠 정도로 도토리묵을 내 주는 좋은 집이었지만 버릇을 버리지 못한 성열은 종종 묵 반 토막씩을 몰래 모아두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길거리 생활을 했다면 그마저도 못했을 것이 불 보듯 뻔 하므로 따로 묵을 모아둘 여유까지 있는 이 집은 지상 낙원인 것이었다. 비자금처럼 모아둔 도토리묵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성열의 표정은 금세 뿌듯한 것으로 바뀌어 그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성열의 표정이 빠르게 난색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는 다시 그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더 이상 수를 헤아릴 묵 덩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틀림없이 엊저녁 까지만 해도 다섯 개가 있었던 묵 덩어리는 하나가 줄어들어 네 덩이만이 독 안에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성열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어지간히 큰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한 듯 한동안 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던 성열은 결국 가지런하게 쌓여있던 장작더미를 향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뒤의 사정은 다시 설명하기 입아픈 일이다.
성열은 주먹을 세게 꽉 쥐었다.
"그 놈을 꼭 잡아야 쓰겠어!"
앞에 도깨비 방망이가 있었으면 금방 주워들고 난동을 부릴 듯 분노를 일으키는 성열을 앞에 두고 성규와 명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도깨비가 도토리묵을 앞에 두고도 관심에 두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중대한 일이었다.
*
씩씩 거리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던 성열이 선택한 것은 자그마한 발목 덫이었다. 덫의 아가리를 쩍 벌려두고 그 위에는 저가 그렇게나 아끼는 도토리묵을 올리기로 했다는 결정으로 좀도둑을 향한 굳은 다짐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그냥 쓰면 발목이 너덜너덜 해질 것만 같은 덫 날에 두께가 두 배는 될 때까지 노끈을 칭칭 감아 둘러대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명수는 저 멍청한 놈이 멍청한 짓 하는 것 좀 보라며 손가락질을 해 대었으나 행위에 집중한 성열의 귀에는 딱히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규는 성열이 하는 모양을 그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피를 보면 그 자리에서 까무룩 하고 나 자빠지는 성열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그리고 다음날 자그마한 나무통을 발목 덫과 함께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성열을 보았을 때 측은지심은 그 무게를 더하였다.
두 번째로 성열이 선택한 것은 말 그대로 덫이었다. 미끼를 두고 그 앞에 장치를 두어 그 것을 건드리면 좀도둑은 우리에 갇히게 되는 덫이었다. 성열은 여전히 의욕이 앞섰고, 그래서 미끼도 도토리묵이었다. 이번의 도토리묵은 처음의 실패를 보고 측은하게 여긴 성규가 직접 준비를 해다 주었다. 그 걸 두고 명수는 쓸데없는 짓에 쓸데없는 손을 거든다며 못마땅한 얼굴 표정을 하였다.
"뭐라도 알고 있는 모양이네?"
"아직도 모르는 게 이상한게지"
"아는 게 있으면 좀 알려주지..."
"저 놈 바보짓 구경하는 맛도 꽤 되니 말이다"
결국엔 이번에도 그저 성열이 하는 양을 구경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성규는 예의 그 측은지심이 가득한 얼굴표정으로 열심히 움직이는 성열을 바라볼 뿐이었다.
성열의 실패는 다음날 죽상을 하고 성규의 방에 나타난 것으로 알고 싶지 않아도 절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도토리묵을 허투루 없앴다는 것에 성열은 분개 하고 분노 하였다. 어떻게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는 일 없이 사라질 수 있느냐는 성열에 말에 명수는 '네 놈이 그리 허술하니 말 다하지 않았느냐' 며 이죽 거렸다. 그 옆에서 성규는 성열이 잠시 으르렁 거리는 것까지 보면서도 싸움이 날까 하는 걱정도 없이 그저 둘이 투닥이는 걸 바라만 볼 뿐이다. 싸움이 나더라도 결국 먼저 꼬리 내릴 건 결국 성열이라는 걸 셋 다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세 번째로 성열이 시도한 것은 잠복이었다. 그 것은 준비작업 부터가 까다로운 일이어서 성열은 비밀리에 밑작업을 시작 하겠노라고 명수와 성규에게 단언 하였다. 그 비밀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반문할 태세인 명수를 성규가 애써 다물렸다. 명수는 곧 못마땅한 표정으로 성열이 하는 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 꼬락서니를 한번 봐 주겠다는 뉘앙스였다. 성열의 밑작업이라는 것은 꼬박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성규는 그동안 질질 끌어오던 신간소설을 한번 다 읽었고, 명수는 성규의 옆에서 열심히 말로써 훼방을 놓다가 욕을 얻어먹었다. 그러고 나서야 성열은 드디어 미끼로 도토리묵을 두고 잠복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성열의 잠복은 3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 3일 동안 성열은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모습을 비추는 일도 없이 잠복에 집중 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4일째가 되던 날, 성열은 성규의 방에 들이닥쳐 추욱 처진 어깨로 방 한 가운데에 대짜로 뻗어 누워 버렸다.
"도토리묵만 버렸어? 또?"
측은지심의 무게가 입에까지 번졌는지 성열에게 물어보는 목소리마저도 왠지 가여운 맛이 돌았다.
"아니이.."
그럼 도둑놈을 잡았다는 말뜻일 텐데도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성규의 눈이 오래간만에 휘둥그레 해졌다. 그걸 느낀 것인지 성열은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옹알이 하듯 중얼거렸다.
"고놈이 사람이 아니더란 말이지이.."
"사람이 아니라니?"
"다람쥐가 꽁무니 빠지게 도망을 가는데 도통 잡을 수가 있나!"
성규의 눈썹이 의혹을 담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아까 전부터 제 옆에 있던 명수를 돌아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니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움직임이 날래고 나무도 막 타?"
"그럼 다람쥐가 땅을 타 아니면 거북이걸음을 해"
대답도 하기 싫은 듯 한 성열의 대답에 성규는 다시 명수를 돌아다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검지를 세워 제 입술위로 조용히 가져다 댄다. 조용히 하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걸 보고서 성규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조만간 도토리 보시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
"점심상입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성규는 책에서 눈을 떼었다. 곧 드르륵 하고 열리는 문 너머에서 점심상을 들고 선 성종이 꾸벅 하는 인사와 함께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다. 성규는 상을 두기 쉽게 저의 작은 책상을 옆으로 치워 주었다. 그러자 바로 그 자리에 성종은 밥상을 답삭 내려놓는다. 볼일을 끝낸 성종이 다시 꾸벅 하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을 때 성규는 '성종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성종은 말이 없이 다시 되돌아 성규를 향하였다.
"도토리 좋아하지?"
말을 하면서도 우스운 기분이 들어 말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성종의 표정은 알듯 모를 듯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도토리고 도토리묵이고 내가 다 줄 수 있는데...... 성열이 도토리 묵 독은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는데..."
성종은 말이 없이 서 있었다. 그걸 두고 성규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당황 했으면 미안해, 그만 나가봐도 돼.' 하는 성규의 말에도 성종은 소리도 없이 한참을 서 있다가 말을 꺼내었다.
"전 사탕 좋아해요. 눈깔사탕 꾸러미."
성종은 다시 꾸벅 하는 인사를 남기고 처음 왔던 날처럼 성규의 방을 나섰다.
정신 놓고 쓴거지...ㅡㅡ;;;
과연 호모의 가치가 있는 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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