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성/계속

[엘규열] 요란 : 사람과 귀신, 그 사이엔 한

성규가 가만히 눈동자를 도륵도륵 하고 굴렸다. 아늑하고 견고하게 짜여 자리 잡은 가구들은 모두 고풍스러웠고 가지런했다. 다음으로는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을 그리고 창밖으로 내리쬐는 마른 햇볕까지 모두 눈에 담고 나서야 아직도 하얀 김을 올리는 엽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빠르게 입 안에 흩어지는 쌉싸름함이 나쁘지 않다.

"어때? 괜찮지?"
"어, 그러네."

동의를 구하는 상대방에게 성규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을 전했다. 그러자 건너편의 남자, 그러니까 우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 전에 하동에 갔다가 얻어왔지."
"하동에?"
"응."

말을 이어가는 우현의 표정이 살그머니 뿌듯허게 변하는 것을 성규는 놓치지 않았다. 우현이 엣헴 하는 헛기침을 내며 흘긋- 성규의 안색을 살폈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눈동자 한 쌍이 모두 저에게 향한 것을 보고서야 만족스런 얼굴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다.

"하동이면.."
"맞아. 김완 선생이 계시지..그리고 그게 바로 네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고"

말을 하며 우현은 저 가까이에 있던 나무 상자를 끌어왔다. 둔탁해 보이는 모양새와는 다르게 상자는 가볍게 끌려와 우현의 정강이께에 바짝 붙어 섰다. 성규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거렸다. 마치 재촉을 하는 듯 한 그 눈빛에 우현은 빠르게 나무상자의 잠금을 풀어내었다. 애를 태우듯 천천히 열리는 상자 안에는 꽤 두터운 굵기의 책이 한권 들어 있었다.

"백야."
"맞아 백야. 바로 어제 가제본 판이 나왔어. 한권은 하동에 가고 있고 한권은 나한테, 그리고 또 한권은 지금 여기."

저 앞으로 내 밀어진 그 책을 성규는 기꺼이 받아 들었다. 손 안에 한가득 잡히는 책의 감촉은 따뜻했다. 백야白夜  가만히 되뇌며 제목을 쓸어내린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글자들이 손끝에 걸려왔다.

"좋은 제목이네."
"김완선생 다운 제목이고."

진지하지 않은 말장난에 둘은 잠깐 동안 키득 거렸다. 그리고는 성규는 그 책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들고 일어서고야 말았다.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우현이 '벌써?' 하며 따라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어."
"아."

성규가 턱짓으로 천장에 가깝게 붙어있는 벽시계를 가리키고 나서야 우현은 고개를 끄덕 거렸다. 웬일로 혼자 나왔기에 자유를 얻은 것인가? 했더니 그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통금이 콩쥐보다 심하네."
"통금이 문제가 아니라 감금을 당할지도 몰라"

성규의 대답에 난처하게 웃는 것은 우현의 몫이었다. '농담을 진담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었어?' 하는 우현의 반문에 성규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오늘 난 여기 없었던 걸로 해줘' 라고 말하는 통에 우현은 다시 헛헛 하는 빈 웃음을 지어야 했다.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성규에게 대고 우현은 열심히 말을 던진다.

"조만간 하동녹차 양껏 들고 찾아가지."
"그럼 고맙고."

'아, 그리고 오른쪽 주머니에 알사탕 꾸러미 잊지 마' 급하게 덧붙이는 우현에게 성규는 '아, 고마워' 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바쁘게 문을 닫고 나서는 성규를 배웅하고 나서야 우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직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정말 무료한 오후였다.

*

성규는 제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하였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밝은 햇빛을 보는 것임에도 그 것에 신경을 옮길 겨를도 없었다. 중천에서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히 뜨거운 기운과 밝음을 과시하며 성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는 땀방울들이 그 것을 증명해 내고 있었다. 턱을 타고 흐르려고 하는 그 것을 성규는 멀끔하게 닦아내고는 옆구리에 끼워 넣은 책을 갈무리해 내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다시 재촉하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우현과의 잡담에 시간도 잊고 빠져든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오래간만에 혼자 밖에 나온 것에 흥분도 했고 신간소설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리고 만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성열과 명수가 온 집안을 뒤집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미도 안보이던 현기증이 돋아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아 어지러워.

아무런 낌새조차 없는 증상을 중얼 거리며 한숨을 푹 하고 내 쉬고 만다. 지금 돌아가면 아마 몇날 며칠을 들들 볶이며 감금을 당하겠다 하는 마음에 차라리 둘과 함께 나올걸 그랬다는 후회까지 밀려올 무렵이었다. 성규는 어두운 골목 초입에 다다라 있었다. 아직 오후 세시와 네 시의 사이 인데도 골목은 어두침침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성규의 발걸음이 멈추어 섰다. 양 미간이 고민스럽게 모여들었다. 평소였으면 아무런 고민 없이 바쁘게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것이 분명 했으나, 이번엔 이유 없이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골목길의 초입에서도 느껴지는 서늘함이 그 이유라면 이유였다. 평소처럼 골목길로 들어서기에는 왠지 께름칙한 기운이 덕지덕지 들러붙어왔다. 그렇다고 이 길을 말끔하게 포기하기에는 지름길이라는 이점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째각째각.
있지도 않은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만 하고 있는 사이에도 속절없이 흘러갈 시간에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성종이라도 대동하고 올걸 그랬나보다 하는 후회감도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성종의 성격이라면 아마 골목길에 들어서든 돌아서 가든 둘 중의 하나는 하고 있을 터였다. 생각이 미치자 성규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왠지 모를 긴장을 풀기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성규의 발걸음은 조금씩 천천히 검은 골목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자박자박 하는 발걸음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성규 말고는 자그만 동물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길수록 미묘하게 감돌던 서늘함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본디 이렇게 서늘한 곳이던가 하고 생각해 보아도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성규의 고개가 갸웃 거렸다. 지금까지 저가 했던 걱정들은 모두 쓸모없는 걱정이었나 싶은 마음에 헛헛한 마음까지 들어서려고 했다. 그럼에도 긴장을 쉬이 풀 수 없는 것은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한기는 거두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생각을 하면서도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곳은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란 걸 지금쯤 집안을 휘젓고 다닐 두 위인에게 질리도록 배웠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느긋하게 옆구리에 끼워 모셔둔 신간소설을 읽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인데,  소설책을 읽기는커녕 집에 도착도 하지 못하고 이상한 골목길에 방치돼 있는 처지에 살그머니 짜증도 차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걸음이 빨라지니 골목의 끝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골목의 끝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서야 성규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 골목의 끝에서는 마치 저가 즐겨 읽는 소설의 한 구절처럼 밝고 따뜻한 햇볕이 한 움큼씩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이만큼 다가온 그 끝을 바로 앞에 두고 우뚝 하고 멈추어서고 말았다.

성규의 눈이 골목을 빼곡하게 채운 가정집 대문 중 하나로 향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대문의 양 옆 기둥에는 하얀 등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명백하게 상중임을 나타내는 대문의 모습에 성규는 '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이유 없이 계속 저를 괴롭히던 한기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서였구먼. 하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이 켕기는 이유는 너무나도 적막한 집안의 분위기 탓이었다. 보통 상집이면 떠들썩하진 않더라도 곡소리라도 나기 마련이건만, 대문이 활짝 열린 이 집의 마당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림자는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마루에 앉아있는 노모가 한명. 성규와 눈이 마주친 노모의 표정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한 듯 멍하게 자리를 지키고만 있는 노모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누군지 모를 떠난 이에 대한 경애를 담아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성규의 인사를 받아주는 듯 맞절을 하는 노모를 확인하고 성규는 걸음을 옮겨 골목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성규의 입에서 한숨이 폭 하고 나왔다. 그 것은 집에 도착해서 들을 잔소리는 벌써 마음 한편에서 모래 산을 만들어 갑갑하게 가슴을 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

성규의 눈이 한없이 높이 솟은 나무의 끝자락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담장을 넘기면서까지 자라 오른 나무는 대문보다 아담한 뒤 쪽문을 받치는  모양새로 서 있었다. 그리고 푸른색이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잎들은 서로 부딪히며 시원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시원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성규의 눈은 나뭇가지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쳐기 시작했다. 성규의 눈이 찾는 것은 이렇게나 커다란 나무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것이어서 눈동자를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몇 분인가를 더 지체하고 나서야  성규는 규칙도 없이 되는대로 흔들거리며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들 사이에서 다갈색의 털이 수북한 작은 짐승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곧 기쁘게 변한 얼굴로 성규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깔때기를 만들었다. 그를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알사탕도 하나 큼지막한 걸로 꺼내 들었다.

"성종아"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를 용케도 들은 것인지 다갈색의 털이 꿈질꿈질 거리며 움직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성규를 향해 돌아보는 일이 없이 성종은 갈색 털만 보여주고 있었다.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등만 보이고 있는 성종을 다시 부르기 위해 양 손을 다시 입가에 모으고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을 때였다. 갈색털이 기다렸다는 듯 커다랗게 요동을 쳤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가 성규를 향해 사연 많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게 마치 '미안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서 성규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고민이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 높은 담장을 날랜 몸으로 훌쩍 뛰어오르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성규는 헛헛 하는 웃음을 토해낼 수 있었다.

"김서방!"

방정맞은 목소리로 성규를 부른 성열은 다시 훌쩍하고 뛰어 내려왔다. 아마도 도깨비란 존재는 힘만 센 게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성열은 금방 성규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제 얼굴을 디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쉴 새 없이 속사포처럼 성규에게 쏟아지는 온갖 수다스런 말들이었다.

"어디 다녀와?? 응?? 어디 다녀오는데? 응?응?"

단순히 행방을 궁금해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성규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성열의 말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서방이 없는 동안 저 짐승 냄새 나는 호랭이가 날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알아?!' 라고 말을 하며 이마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혹을 보여주고서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하고 열리는 쪽문과 함께 말하기를 그만 두었다. 하지만 그 것은 곧 성규에게 가해질 2차적 공격에 대한 예고일 뿐이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활짝 열린 쪽문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의 명수가 야차처럼 자리를 잡고 서 있던 것이다.

"저놈 쓸모가 고작 그런 거 달고 들어오는 건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심통이 가득한 목소리는 역시 명수였다. 쪽문을 열고 자박자박 걸어 나오는 명수의 시선이 잠깐 나무 위로 갔다가 다시 성규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그 것은 혼자 밖으로 나도는 성규를 막지 않은 성종에 대한 원망의 눈초리일게 틀림이 없어서 성규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성종은 벌써부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나무 위에서 자취를 감춘 지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러면 심통이 가득해 보이는 명수의 잔소리받이는 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명수는 찬찬히 성규의 앞으로 와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옆구리의 책을 쏘아보았다.

"넌 곧 죽어도 그 책을 포기는 못하겠다 하겠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성규의 고개가 갸웃 거렸다. 명수는 다시 책을 보다가 성규의 어깨 너머를 흘끗 노려보았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책에 위해라도 가하겠다는 뜻인가 싶어 성규의 목소리도 덩달아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 책 아직 발간도 안됐어. 신간이란 말야."

말끄트머리가 점점 작아들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은 어느새 다소곳이 앞으로 가져와 표지를 문지르고 있었다. 심플하게 양각된 제목 백야白夜가 손끝에 부드럽게 걸려왔다.  그 모양새를 보는 명수는 결국 잇새를 쯧쯧 하고 차고 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규는 여전히 그 책을 소중히 들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던 명수는 기어코 홱 하고 돌아서 버렸다.

"고생을 사서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수는 없지"

아직 못마땅함이 다 가시지 못한 목소리였다. 단호한 뒤통수만 보여주며 마당으로 들어가는 명수를 따라 성규도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익숙한 오한이 목덜미로 훅하고 끼쳐왔다. 그리고 성규에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와 기우뚱 하고 중심을 잃는 저의 몸, 그리고 귓가로 들리는 '김서방!' 하는 성열의 목소리와 '3일이면 돼요. 정말이에요.' 하는 정체모를 여자의 목소리였다.

*

성규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정말로 딱 3일이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죽은 듯이 지내야 했던 그 3일 동안 성규의 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열려 있었다. 가끔은 '김서방! 김서방!' 하고 애타게 저를 찾는 성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때로는 저의 머리맡에서 못마땅한 기운이 잔뜩 느껴지게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려왔다.  게다가 모르는 사이에 열도 많이 올랐던 모양인지 물수건을 갈러 다녀가는 소리들도 간간히 들려왔다. 몸은 조금도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생각도 할 수는 있었으나 말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곧 사고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그리고 그 무렵이었다. '3일'이면 된다며 애원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제 귓가에 대고 옹알이를 하는 줄만 알았으나 다시 들어보니 그 것은 바로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여자는 무언가를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성규는 다시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제야 여자가 무얼 하는 건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책이구나!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성규는 소리를 질렀을 게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여자가 책을 낭독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발음도 점점 또렷해져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성규는 그 책의 정체조차도 알아챌 수가 있었다. 백야. 저가 옆구리에 소중히 끼고 돌아왔던 김완 선생의 신간소설 백야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자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코 여자가 마지막 문장까지 마무리를 지었을 때 성규의 의식은 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규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3일 약속 지켰어요. "

그 뒤에 따라붙는 한 두 마디의 말들은 희미해지던 의식처럼 희미하게 번져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을 때 성규는 현실 속에서 두 눈을 뜨고 있었다.

"김서방 눈 떴다!"

줄곧 머리맡에서 성규를 보고 있었던 건지 성규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성열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양새로 왁! 하는 감정을 가장먼저 내놓는 것도 영락없는 성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성열의 뒷덜미를 잡고 밖으로 내다 던지는 것은 역시나 명수였다. '시원한 숭늉이나 한 그릇 떠와!' 하는 명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깥에서 '아 진짜 저 냄새나는 짐승이!!' 라고 분노하는 성열의 목소리도 빠지지 않고 들려왔다. 오래간만에 보는 모습에 베싯 하고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나서 가장먼저 느껴지는 것은 깨질 것 같은 두통이었고 그 다음으로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머리맡에서 무서운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명수의 존재였다. 곧게 양반다리를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도 저를 향해서) 앉아있는 모습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성규는 조금 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래 사서하는 고생은 할 만하던가?"

아직 심통스러운 것이 가시지 않은 명수의 말에 성규는 금방 그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조금은 벅차오르는 감정까지 뒤섞여 흘러나오던 그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 여자?"
"쓸데없는 감만 늘려놓고 갔네."

명수의 미간이 주름을 만들며 모여들었다.

"그 여자를 알아?"
"알기는, 그냥 잡것이지."

잡것이 쓸데없는 것도 남기고 갔지 않은가. 여전히 못마땅한 말투로 툭툭 던지며 명수는 책상위에 백야와 만년필을 툭 하고 던져 내 놓았다. 뚜껑에는 김완 선생의 이름이 정자체로 들어가 있었다.

*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현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꼭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는 저를 놀려먹는 것만 같아서 성규는 허허 하고 쓴 웃음을 뱉을 뿐이다.

"살만 해 보이네?"
"죽을 맛이야."

우현에게 농을 던지며 명수를 올려다보니 저를 내려다보는 눈이 더 매섭게 빛이 난다. 아마도 틈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뜻인 게 뻔 하게 보이는 탓에 저를 무겁게 누르는 이불을 더 꽁꽁 싸맬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우현은 냉큼 성규의 이부자리 맡에까지 와 자리 잡고 앉았다. 그제야 아래위로 다 검게 챙겨 입은 옷이 성규의 눈에 들어온다.

"근데 웬 상복이래?"
"아, 여기 근처에 상복입고 갈 일이 있었어.."
"여기 근처?"

되묻는 성규의 말에 우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앞에 놓인 주전부리 하나를 주워 입에 넣었다. 금방 입안에 퍼지는 단맛이 마음에 든 건지 우현은 또 하나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여기 근처에 앞에 골목 있잖아 거기"

거기라면 성규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신간 책을 받으러 갔던 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잘 아는 사람이야?' 하는 물음이 절로 나갔다. 성규의 물음에 우현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그저 고개를 끄덕 거릴 뿐이었다.

"그 책, 담당 직원이었지, 가제본판 나오기 바로 전에 교통사고가 났지 뭐야. 그 작가 너무 좋아해서 일부러 일 그렇게 맡긴 거였는데 안타깝게 됐어."

우현의 말을 들으며 성규는 다시 명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성규의 표정을 명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표정이 뚱 해보였다. 그런 거 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하는 표현이다.

"근데 이건 또 어떻게 여기에 있대?"

우현이 본 것은 소설책 옆에 정리해 두었던 만년필이었다. '이거 그 사람이 김완 선생한테 받았다고 자랑자랑 하던 거였는데' 하고 이어지는 우현의 말소리를 들으며 성규는 그만 이불 안으로 얼굴을 묻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알 수 없게 던지는 명수의 말은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연성 > 계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규열] 요란 : 도련님의 요양  (0) 2016.02.23
[엘규열] 요란 : 도깨비와 덫과 도토리  (0) 2016.02.23
[엘규열] 요란  (0) 2016.02.23
[현성] 인사이드파크 호텔  (0) 2016.02.23
[현성] 인사이드파크 호텔  (0) 201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