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성/계속

[엘규열] 요란 : 도련님의 요양





마루에는 볕이 아주 잘 들었다. 그 햇볕이 비추는 곳에 성규는 기분 좋게 드러누워 있었다. 온화하고 따스한 햇볕은 몸과 마음을 노곤노곤하게 풀어주기에 충분했으므로 두 눈은 자연스럽게 내려 감았다. 아주 오래된 마루였다. 기분 좋게 드나드는 들숨으로 결 좋은 나무의 오래되고 향긋한 내음새가 같이 드나들었다. 기분은 금방 두둥실 떠오른다. 따사롭게 내려오는 햇볕, 그리고 시원하게 부는 바람. 무엇 하나 신경에 거슬리는 것 없이 조화롭다. 성규의 입이 깊은 호선을 그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건 갑갑해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성규였지만 이런 느긋함이라면 평생 이러고 있거라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며칠째 생략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과였던 것처럼 꼭꼭 해오던 낮잠을 어김없이 즐기려던 참이었다. 투다다다닥 하고 요란스럽게 마룻바닥을 구르는 발소리만 없었다면 말이다. 주름 하나 없이 판판하던 성규의 눈가가 금세 굵직한 주름을 만들어내며 찌푸려졌다. 온화한 시간에 맞지 않는 소음이 거슬린 탓이다.

"시끄럽다아."

담뿍 취해 있던 잠에서 깨지 못해 말끝이 길게 주욱 하고 늘어났다. 아직까지는 기분 좋게 나른해진 기분이 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그 기분에서 헤어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발소리는 금방 뚝 하고 끊겼다. 대신에 어두운 그림자가 성규의 얼굴에 드리웠다. 자그맣게 손바닥만큼의 면적도 차지하지 못하던 그림자는 그 면적을 더하며 점점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딱 평범한 남자만큼의 면적을 채우고서 그 부품을 멈추었다. 성종이다.

"산책하실 시간입니다."
"지금은 잘래에"
"하루에 반시 진은 산책 하라고 하셨는데요."

누가 시켰는지 일부러 빼 먹은 듯 한 그 자리에 들어갈 것은 명수일게 분명했다. 성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뒹굴 하고 성종에게로 돌아누웠다. 깜빡깜빡 거리는 눈꺼풀이 느릿느릿 하다.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모양새에 성종의 입에서는 가벼운 한숨이 포옥 하고 흘러나왔다.

"전서구가 와 있습니다."

명백한 협박성 어구다. 일부러 전서구 까지 보낼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명수의 얘기였다. 하루에 한 번씩 성규의 일과를 묻는 전서구에 답서를 보내는 것은 성종의 일이었으므로, 거기에 대고 하루 종일 마루에 누워 뒹굴었답니다. 하고 보낼 것이라는 협박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아마도 이틀 후에는 귀가 따갑기 보다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잔소리와 함께 등장할 것이 뻔하다. 성규는 곧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언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생각도 하지 말라더니!"
"여기는 움직이는 게 좋은 곳이니까요."

작게 투덜투덜 거리는 성규에게 성종은 지지 않고 대꾸 하였다.

이건 요양이 아니라 들들 볶이러 온 것 같다는 둥,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좋은 공기는 저절로 마실 수 있다는 둥 성규의 투덜거림은 산책로를 걸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성종은 그 뒤를 졸졸 따라 붙으며 들리지 않게 키득 거릴 뿐이다. 그러게 어디서 근본도 모를 귀신에 들려오시래요? 단호하게 앞만 보고 있는 뒤통수에 대고 말하니 금세 팩 하고 돌아서는 얼굴에는 불만이 한 가득 서려 있다. 성종이 일부러 큼큼 하고 목을 다듬는 소리를 내었다.

"그 것 때문에 여기 오신 거니까요."

이어지는 말에 성규는 다시 얌전히 몸을 돌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얼마 전 인기 작가 김 선생이란 자의 신간 소설에 얽혀 뜻하지 않게 한 서린 처녀귀신이 들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일주일을 내리 앓았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물론 진짜로 앓아 누은 건 3일이었고 나머지는 강압에 못 이긴 자리보전이었다. 어찌 됐든 정말로 정신을 잃고 앓았던 그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김 서방이 일어나 앉아야 내가 묵을 얻어먹지이!' 하고 내용과는 다르게 걱정이 가득 담긴 말투로 징징댔다는 성열의 사연이나, 이래저래 맘에 드는 게 없는 것처럼 흥흥 대면서도 시간 되면 치다꺼리하러 성규의 머리맡에 와 앉기 바빴다는 명수의 사연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깨어났을 때 보인 게 성열의 뒷덜미를 잡고 밖으로 내 던지는 명수의 모습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대해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일주일동안의 요란한 병치레를 겪고나서 명수는 말했던 것이다. '몸이 허한 게 문제가 아니라 양기가 부족한 것 같으니 요양을 좀 보내는 게 좋겠다.' 하고. 성규의 가족들은 명수의 의견을 환영했다. 그리고 빠르게 성규의 요양 원정대가 꾸려진 것이다. 요양지의 선택은 수많은 지방의 별장 중에서 가장 양기가 좋은 곳으로 됐다. 물론 명수의 결정이었다. 명목상이긴 했지만 개인 가정교사로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성규와 할아버지, 그리고 성열과 성종 뿐이었다.) 알려진 명수의 의견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성규는 성종과 함께 양기가 강하다는 지방의 별장으로 향한 것이다. 왜 둘 뿐이었는가 하면, 가정교사 말고도 집안의 장부관리를 맡고 있는 탓에 바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명수와 그저 '네가 가 봤자 사고만 칠게 뻔하지' 하고 명수에게 뒷덜미를 잡혔을 뿐인 성열의 사정 때문이었다.

"김 서방 내가 없어 심심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성열은 근본 없이 발랄한 도깨비의 성미와는 맞지 않게 축 처진 몸으로 성규에게 말 했다. 그 뒤에서 명수는 뚱 한 얼굴로 '네 놈이 없어서 더 편하게 쉬겠지.' 하는 말을 영혼 없는 말투로 내 뱉었다. 그 소리에 잠시 매서운 눈빛을 내 던 성열의 눈은 금방 다시 축 처져서 힘이 없는 모양새를 갖췄다. 그 모양새가 웃겨 성규는 소리 없이 키득 거렸다.

"고작 나흘 떨어져 있을 건데 왜 이렇게 아쉬워 해."

그래도 축 처져 있는 게 측은 해 손을 잡고 흔들어 대니 힘이 없는 눈으로 성열이 말했다. '그럼 나흘이나 김 서방이 주는 묵을 먹지 못한다는 말이잖아!' 그 말투가 퍽이나 슬프게 들려서 이번엔 성규의 눈이 축 하고 처졌다.

"그만, 성규 너는 또 쓸 데 없이 잡것에 홀리지 않게 조심이나 해.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그러니까 너는 이 녀석이 이상한 데로 빠지지 않게 잘 보고 있으란 뜻이다."

명수의 눈이 성규의 뒤편에 서 있는 성종에게 향했다. 거기에 대고 성종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하는 것으로 답 하였다. 어지간히도 잘 하지 않겠느냐 하는 뜻이었다. 많은 힘이 있는 건 아니어도 그 정도는 뒤에서 막을 정도는 되었다. 그 모양새가 맘에 들지는 않는 것인지 명수의 입이 금방 한일자로 닫혔다.

"나흘 뒤면 올 거면서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전적이 있으니 하는 말이지!"

당사자를 빼놓고 이리저리 오가는 대화가 맘에 들지 않아 내 놓은 말에 금방 핀잔이 돌아왔다. 결국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은 성규였다. 그래그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어도 일을 낸 게 잘못인 게지.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성규의 요양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

산책로는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본가에 있었을 적에, 그 의도와는 거리가 멀게도 이리 저리 사건이 휘말렸던 덕에 시끌벅적 하게 지냈던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새기는 했다. 그래서 한동안 신이 나서 주변 산책로를 거닐기 바빴다. 오래간만에 밟는 흙바닥이 반가웠고 실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싱그러웠다. 그래서 하루 종일 산책로를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다닌 게 첫째 날이었다. 둘째 날은 첫째 날의 호들갑 때문인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그걸 두고 성종은 귀신같이 '그렇게 호들갑 떨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해 오는 통에 성규는 '내가 너한테 준 알사탕이 몇 봉지인데!'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거기에 또 지지 않고 '도련님이 편찮으시면 제 등쌀이 남아나질 않으니까요' 하는 대답을 해오는 성종에게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어쨌든 저나 성종이나 명수의 앞에서는 윗사람이 됐든 아랫사람이 됐든 처지는 비슷할 게 뻔히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하루를 꼬박 쉬고 나서야 몸이 괜찮아 진 성규는 성종의 등쌀을 못 이겨 산책을 나온 참이었다. 이미 한 번 쭉 돌아본 경험이 있어 주변의 경관이나 길의 모양새들은 눈에 익은 것들뿐이다. 그래도 발을 빠르게 놀리지는 못했다. 뒤에서 성종이 매의 눈을 하고 감시를 하기 때문이다. 성규가 여전히 저의 뒤에서 자리를 지키는 성종을 확인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눈이 마주쳤다.

"너 지루하구나?"
"걷기만 하니까요."
"지루하면 먼저 별장에 가 있어도 돼."
"또 무슨 변고를 당하시려구요."

볼멘소리를 내고서는 입을 꾹 다무는 얼굴이 제법 쀼루퉁 했다. 그 걸 두고서 성규는 허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요즘의 성종은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미묘하게 표정이 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에서 유감없이 불만을 표시한다던가 하는 일들에서 성규는 눈에 띄게 그런 것들을 느꼈다. 볼에 바람을 넣고 부하게 부풀리는 모양새는 어디서 배워왔는지 유난스럽게 자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 것도 별 볼일 있는데서나 그렇지 여기처럼 아무 것도 없는 데서도 그럴까"

너 이런 곳에 오는 것도 오래간만이잖아. 하는 말을 덧붙이니 성종의 표정이 슬금슬금 풀리는 게 확연히 보였다. 마지막으로 '여기 나무 타고 싶게 생기지 않았어?' 하는 말이 치명타였던지 성종의 얼굴이 금세 느물느물하게 풀렸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느물느물 풀린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비장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성종에게 똑같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거리니 금방 '그럼 믿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눈앞에서 모습을 바꿨다. 다람쥐였다.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몸놀림이 재빨랐다. 나뭇잎 사이로 그 작은 몸체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성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그늘 좋은 나무 밑에서 낮잠이라도 한잠 자다가 돌아가면 좋을 것 같았다.

감시하는 눈이 사라지니 느긋해진 마음처럼 발걸음도 더 느긋해 졌다. 가벼운 발걸음 아래로 서걱 이는 소리를 내는 흙길 덕에 기분도 조금 더 부풀어 올랐다. 머릿속으로는 첫째 날 보아두었던 아름드리나무를 떠올렸다. 산책로 한쪽 복판에 사람을 반기는 것처럼 우뚝하니 서 있는 한 품, 아니 두품에도 다 안기에 모자랄 것처럼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였다. 사방으로 모자람이 없이 쭉 뻗은 나뭇가지에 빈틈없이 매달린 나뭇잎들은 살랑대는 바람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주변의 공기보다 약간 더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해 보이는 그 나무그늘 아래서 라면 낮잠을 한  번 시원하게 자는 것도 좋아 보였다. 나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일 먼저 풍성하게 오른 나뭇잎이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으로는 나뭇잎들을 잡아 쥐고 있는 품이 큰 나무의 몸통이, 그러고 나서는 그 아래 그늘에 앉아 있는 색동옷을 걸친 자그마한 아이가 보였다.

성규의 머리가 비스듬하게 누웠다. 듣기에는 주변에 사람이 살만한 인가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색동옷을 입은 꼬마 아이라니? 길이라도 잃고 지쳐 쉬는 걸까 하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건 또 나름대로 말이 되는 것 같아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되는 답을 금방 떠올린 머리를 칭찬하며 어깨를 한번 으쓱 거렸을 때 그늘 밑의 아이는 성규와 눈을 맞췄다. 고개를 움직인 것이다. 하얗고 말간 얼굴이 성규를 보면서 반가움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머리위로 휘휘 흔들었다. 일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반가워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성규의 손도 머리통 옆에서 흔들린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를 알아?"
"응, 알지. 엊그저께 왔잖아?"

의아함을 가득 담은 성규의 물음과는 다르게 맑게 갠 아이의 대답은 명쾌했다. 거기에 대고 '으응 그렇지' 하는 조금 맹한 대답을 하고서는 그 옆에 그늘에 철푸덕 하고 주저앉았다. 아이는 그걸 보고서 또 까르륵 거리면서 웃는다. 대책 없이 맑은 그 모습이 더 불안할 만도 하건만 그걸 보고서도 불안함이나 불편함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나를 봤어?"
"여기 지나가는 거 봤지."
"난 너 못 본 것 같은데?"
"당연히, 못 봤을 거야."

아이는 다시 까르륵 하고 웃었다. 성규의 고개가 갸우뚱 하고 넘어진다. '숨어 있었어?' 하고 자그맣게 묻는 말에 아이는 다시 작은 머리를 도리질 쳤다. '숨은 건 아닌데 못 보는 게 당연해' 하고서는 두 눈을 휘어트렸다.

"근데, 오래간만에 사람을 보니까 반갑잖아. 그래서 이렇게 나와 버렸어."

미묘하게 현실감을 빗겨나가는 아이의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말았다. 나무아래 그늘에 들어오면서 주변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현실에서 동떨어짐을 느낀 탓이다. 그 흔한 점 하나 잡티 하나 없이 해끔하게 핀 아이의 얼굴에는 금방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기까지 올 정도면 몸이 많이 약한가보다."

놀린 다기엔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라 오히려 말이 턱 하고 막혔다. 그걸 알 리 없는 아이는 금방 두 팔을 과장되게 흔드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본 사람은 몸이 이렇게 배짝 말라 있었고, 그 전에 본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 전에는..... 하면서 고사리 같은 손가락도 한 개씩 접어 갔다. 그걸 앞에 두고 차마 '나 낮잠좀..' 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어 아무런 의지도 담기지 않은 고갯짓을 하고 있으려니 '그래도 개중에는 제일 나은 사람이네!' 하면서 아이는 커다란 눈으로 성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아이는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 낮잠 자러 오는 거였지?!"

연신 '미안, 미안해' 하는 말을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해 대다가 곧 정말로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간절한 눈을 보였다. 무슨 부탁이라도 할 것처럼 해오는 모양새에 마음에도 없이 '왜?' 하는 대답을 입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곧 후회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다시 해끔하게 돌아오는 아이의 얼굴에 그 기분도 조금 해소가 돼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베싯 하고 웃었다.

"얘기가 듣고 싶어."
"얘기?"
"여기는 사람을 만나기가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사람 사는 얘기."
"사람 사는 얘기 별거 없는데."
"그냥 아무 얘기나 좋아."

처음에는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결국 곧 말을 이을 것처럼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야 말았다. 아이는 턱에 손을 괴고는 큰 눈을 반짝 거렸다. 그러고는 성규가 풀어놓는 별 볼일 없는 일상의(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명수, 성열과 함께 지내면서 휩쓸린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야기들을 다소 과장된 반응들과 함께 흥미로움을 표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결국 연달아 대여섯 개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고 나서야 성규는 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조금 힘이 드는 것처럼 숨을 돌리는 성규의 왼 손을 아이는 작은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재밌었어. 정말로, 그러니까 보답을 해줄게."
"응?"
"내 보답이야. 보답."

으응? 하고 멍청한 대답을 하는 성규를 보면서 아이는 두 손으로 왼손을 조물조물 거렸다. '나랑 놀아준 보답이야.' 하는 말을 다짐처럼 내 뱉은 아이의 얼굴이 성규의 왼쪽 손바닥으로 점점 내려앉았다. 말캉한 입술은 손바닥의 한 복판에 닿았다. 아이의 맑은 눈알이 내려앉은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성규의 작은 두 눈이 연신 깜빡깜빡 거렸다.

"이제 원하는 대로 자도 돼. 낮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명수, 성열과 엮이고 나서부터 안 겪어본 일이 없는데도 생소함이 온 기운에 머물렀다. 무겁게 깜빡깜빡 거리는 성규의 눈을 아이는 말갛게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혔다. 무언가 잊었다는 듯, 두 눈도 커다랗게 뜨고서는 활짝 하고 웃었다.

"나 이름! 내 이름 거야. 성 없이. 한자는 느티나무 거."

뿌듯허게 활짝 하고 웃는 얼굴 뒤로 부옇게 흔들리는 나뭇잎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저게 느티나무였다.

*

명수와 성열은 정말로 딱 4일째 되는 날에 성규의 일행과 합류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김 서방!' 하고 달려오는 성열에게 그동안 내 주지 못한 4일치의 도토리묵을 내어 주니 연신 '역시 김 서방밖에 없어!'를 외치며 온 집안을 방방 뛰어다니는 통에 성규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걸 가라앉히는 것은 성열과 원치 않게 동행해야 했던 명수 몫의 일이 됐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은 성규의 왼 손을 노려보는 일이었다. 곧 뚫기라도 할 것처럼 한참 동안 성규의 왼손을 노려보다가 결국 그 팔목을 집어 올려서는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야 말았다. 곧 맘에 안 드는 듯 획 하고 패대기치듯 내 던지고 말았지만. 그러고서는 불만이 가득하게 혀도 찼다. 쯧쯧, 하고.

"그렇게 한 눈 팔지 말라고 했거늘"
"왜? 나한테서 냄새라도 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제 매무새를 고치며 되묻는 성규를 명수는 획 하고 돌아서며 노려보았다.

"어디서 근본 모를 것이랑 사귀고 와서 일을 만들어와!"

그 말에도 어깨를 으쓱 하고 마는 성규를 보며 명수는 제 머리를 짚었다. 왼손에서 맡은 희미한 나무 냄새는 오래된 느티나무의 것이었다. 아주 오래돼서 영이 깃든 느티나무의 맑은 냄새는 아마도 자그마한 축복의 자국이었다. 오래 가지는 못해도 방해받지 않은 휴식 정도는 보전해 줬을 법한 아주 자그마한 배려의 자국이었다. 원래대로면 흔적도 남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오래된 놈인지 느티나무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보답 삼아 나무 아래 자그마한 공양이라도 남겨야 되는 게 이 세계의 도리다. 그 냄새가 거슬려서라도 얼른 공양이나 내 주고 훌훌 털어 버리고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만난 건지 감도 잡히지가 않았다. 곧 한숨이 푹 하고 나오고야 만다. 물론 그런 건 꿈에도 알 리 없는 성규 때문이다.


명줄 좀 소중히 하거라.

볼멘소리는 이번에도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계...계간연재....?